정기훈 기자


올해는 먹고살 권리, 쉴 권리 등 노동자들의 기본적인 권리에 대한 논쟁이 뜨거웠다. 십수년간 미뤄져 온 새로운 노사관계 제도가 시행되면서 노사정의 관심은 복수노조에 쏠렸다. 고 이소선 어머니를 비롯해 진보·노동진영의 거목들이 잇따라 운명했다.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노동계 안팎에서는 일찌감치 정치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살아남는 것조차 힘겨웠던 노동자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올해 1월6일 부산 영도조선소 크레인에 올랐다. 희망버스 투쟁과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에 대한 청문회가 이어졌다. ‘사람 죽이는’ 정리해고에 대한 경고였다.

지난해 내내 구조조정 계획을 흘렸던 한진중공업은 결국 같은해 연말에 400여명에 이르는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했다. 올해 초 김진숙 지도위원의 농성이 시작됐지만, 2월 노동자 170여명에게 정리해고가 통보됐다.

노사는 시민들의 희망버스 참가, 정치권의 적극적인 개입 끝에 정리해고자들에 대한 재고용에 합의했다. 이 과정에서 2009년의 쌍용차처럼 기업의 경영실패 책임을 노동자들이 고스란히 떠안는 한국의 기업경영 폐해가 도마 위에 올랐다. 특히 한진중공업과 관련해서는 실제 구조조정을 할 만큼 기업경영이 어려웠는지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한진중공업 해고자들은 국민의 큰 관심이라도 받았지만, 이미 2년 전 길거리로 나앉은 쌍용차 노동자들의 현실은 참혹했다. “해고는 살인이다”는 구호를 입증이라도 하듯 스러져 갔다.

생계에 어려움을 겪던 희망퇴직자가 1월에 연탄불을 피워 놓고 자살한 것을 시작으로 올해만 7명의 쌍용차 출신 노동자와 가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돌연사했다. 쌍용차 정리해고자들은 한진중공업 투쟁에 희망을 품고, 휴직자 복직 등 합의 이행을 요구하면서 경기도 평택시 쌍용차 공장 앞에 희망텐트를 쳤다.

정리해고와 노사합의 불이행이 일상화된 한국사회에서, 1년 뒤 한진중공업 해고 노동자들이 희망텐트를 쳐야 하는 것은 아닐까.

“밤에는 자야”… 뒤늦게 사회적 쟁점화

‘잘리지 않고 일할 권리’만큼 ‘쉬면서 일할 권리’도 따내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 준 2011년이었다. 파업과 직장폐쇄, 경찰력 투입, 용역과의 충돌 등 숱한 사건을 낳은 금속노조 유성기업지회의 핵심 요구는 노동시간 단축이었다. “밤에는 잠을 자고 싶다”는 것이었다.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단락된 뒤, 지리멸렬했던 교대근무제 개편과 노동시간 단축 논의에 불이 붙었다.

고용노동부는 10인 이상 기업과 완성차업체의 근로시간 실태조사 결과를 잇따라 발표했다. 현대자동차 등 완성차업체에는 개선계획서까지 내도록 했다. 또 야간노동을 특수건강검진 대상에 포함시키는 방안을 추진하면서 밤샘노동이 작업장 유해물질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정부의 적극적인 조치가 열매를 맺을지, 보여 주기 식 정책에 머물지는 내년에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기어이 오고만 대격변, 복수노조

대격변이 기어이 왔다. 올해 7월부터 시행된 사업 또는 사업장 단위 복수노조 제도는 노사정 관계자들을 긴장시켰다. 전북지역에서는 임금·단체협약 체결에 반발한 버스노동자들이 별도로 노조를 만들어 파업을 하면서 장기화됐다. 미지급 수당 반환이 핵심 쟁점이었지만 복수노조 시대를 앞두고 양대 노총 소속 노조 간 조직경쟁의 전초전이나 다름없었다.

막상 복수노조가 시행되자 노동계가 우려했던 회사노조(Company Union)가 기승을 부렸다. 회사노조는 버스업계와 택시업계에 집중됐고, 양대 노총 소속 사업장을 가리지 않았다. 5개 발전자회사에는 모두 새 노조가 생겼다.

사용자측이 새 노조를 지원한 정황이 여기저기서 발견됐고, 일부 사업장은 부당노동행위로 기소되기까지 했다.

‘무노조 경영’의 삼성에도 노조가 생겼지만, 한 달 앞서 ‘페이퍼노조’가 단체협약을 체결하면서 교섭 한번 해 보지 못했다.

가장 큰 논란은 단연 복수노조 제도 시행시기였다. 개정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시행시기를 2010년 1월1일로 본 정부는 2010년부터 올해 7월1일 사이에 교섭을 시작한 노조의 교섭대표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수개월에 걸쳐 교섭한 노조가 교섭대표권을 뺏기는 일이 속출했다.

하지만 복수노조 시행 한 달이 조금 지나 “복수노조 관련 법 시행일은 2011년 7월1일”이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 최종 결정이 나올 때까지 법 시행일과 관련한 혼란이 계속될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이소선 어머니 등 거목들 눈감아

올해는 유난히 노동계와 진보진영의 버팀목 역할을 했던 인물들이 눈을 감았다. 9월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의 타계는 노동계 뿐 아니라 정부에도 충격을 줬다. “하나가 돼라”는 고인의 살아생전 소원을 들어주지 못했던 노동계는 슬픔에 빠졌다.

고인의 분향소가 설치된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는 이름 모를 시민들의 발걸음이 줄을 이었다. 유명 정치인은 물론 이채필 노동부장관도 조문을 했다. 5월에는 전국농민회총연맹 의장을 지낸 정광훈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이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운명해 진보진영을 안타깝게 했다.

이달에는 월간 노동세상 발행인인 노동운동가 이춘자씨도 뇌출혈로 쓰러져 운명을 달리했다.

노동계, 벌써 정치의 계절

2012년 대한민국의 최대 화두는 총선과 대선이다. 올해 노동계에도 일찌감치 정치 바람이 불었다. 올해 1월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이 당선된 것은 단순한 지도부 교체가 아니었다. 이 위원장은 당선되자마자 한나라당과의 정책연대를 파기하면서 한국노총의 정치행보에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국노총은 4·27 재보궐선거와 10·26 재보궐선거에서 야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했다. 한국노총은 내부의 극심한 논란 끝에 민주통합당 창당에 참여했다. 정책연합이나 정책연대 수준을 벗어나 창당에 직접 참여하는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민주노총이 배타적으로 지지했던 민주노동당 역시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출신들이 주축이 된 통합연대와 합당해 통합진보당을 출범시켰다. 민주노총이 내년에 통합진보당을 배타적으로 지지할지 관심이 모아진다. 내부 반대가 만만치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잇단 야권 통합과 여기에 발을 깊숙이 발을 들여 놓은 양대 노총. 그리고 내년에 치러지는 총선과 대선. 내년 노동계의 정치적 움직임이 주목된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