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노사정 전문가가 선택한 ‘2011 올해의 10대 인물’은 예상을 뛰어넘지 않았지만 변화는 뚜렷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의 인물들이 10위권 안으로 대거 진입해 노동을 둘러싼 지형이 바뀌고 있음을 반영했다. <매일노동뉴스>는 노사정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응답자 1명당 올해 인물 최대 10명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2011 올해의 10대 인물’을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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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인물 1위는 누구나 예상했듯이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에게 돌아갔다. 100명의 노사정 전문가 가운데 97명이 그를 선택했다. 올해의 10대 노동뉴스에서 1위를 차지한 한진중공업 사태는 ‘올해의 10대 인물’ 리스트도 싹쓸이했다. 조남호 회장(5위)·송경동 시인(6위)·배우 김여진씨(공동 10위)·희망버스 참가자(공동 10위) 등 한진중 사태의 주역들이 10위권의 절반을 차지했다.

9월 전태일 열사 곁으로 돌아간 노동자의 영원한 어머니 고 이소선 여사는 올해의 인물 2위(68표)로 선정됐다. 정치실험의 선두주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4위를 차지했고, ‘가카를 위한 헌정방송 나는 꼼수다’ 출연진이 공동 10위를 기록해 새로운 정치에 대한 뜨거운 열망을 실감케 했다. ‘가카’는 당선 이후 처음으로 올해의 10대 인물 순위권에도 오르지 못했다.

‘가카’를 비롯해 수년간 변함없이 선두그룹을 차지했던 노사와 정부의 핵심 수장들이 뒤로 물러났다는 점이 올해의 가장 큰 변화다. 지난해 1위를 차지했던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올해 9위로 여덟 계단 밀려났고, 이희범 한국경총 회장은 20위권 안에도 들지 못했다.



해고 무덤 위에 희망을 세긴 이들



우리 시대‘김진숙’은 저항과 희망의 아이콘이다.

올해 1월6일 한진중 정리해고 교섭이 답보 상태에 빠지고 해고가 눈앞에 닥쳤을 때 그는 홀로 크레인 위에 올랐다. 김주익 전 한진중지회장이 죽어서 내려온 바로 그 크레인이었다. 얼마 전 성공회대 노동대학 초청으로 강단에 선 그는 “한때 자살을 생각했었다”며 “농성을 하면서 가장 두려웠던 숫자가 129와 60이었다”고 말했다. 고 김주익 지회장이 목을 맸던 날이 농성 129일째였고, 그때 마지막까지 고인의 곁에 남았던 노조원 숫자가 60명이었다. 그런데 김 지도위원의 농성 157일째 기적처럼 희망버스가 85호 크레인 앞으로 왔다. 절망은 희망으로 바뀌었다.

외롭고 쓸쓸한 35미터 높이의 크레인 위에서 그가 세상과 소통했던 트위터도 빼놓을 수 없다. 140자 속에서도 진정어린 그의 마음은 세상과 통했다. 땅으로 내려가면 라면 먹고 찜질방에서 몸을 지지고 싶다는 그의 소박하지만 간절한 바람을 읽은 트위터리안들에겐 정리해고는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니었다. 송경동 시인은 시민들에게 "김 지도위원 살리러 부산으로 가자"며 희망버스에 엔진을 달았다. 그리고 희망버스는 국회를 움직였다.

‘조남호 신드룸(기업인들이 해외출장을 핑계로 국회출석 거부하는 행태를 꼬집는 말)'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킨 조남호 회장도 올해 한진중 사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50일간 '해외도피성 출장'과 '몰래 귀국' 사건으로 국회를 기만한다는 비판을 듣다가 결국 청문회장에 섰다. 어눌한 말투로 예상질문을 담은 '커닝페이퍼'를 읽는 모습이 사진으로 대문짝만 하게 보도되면서 청문회 스타(?)의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 냈다. 그렇게 버티던 조 회장은 막판에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의 권고안을 수용했고, 한진중 사태는 일단락됐다.

김 지도위원은 11월10일 무사히 귀환했다. 그는 고공농성으로 얻은 울렁증 때문에 아직 요양 중이다. 자신에게 쏠리는 사회적 관심을 아직도 싸우고 있는 쌍용자동차 노동자에게로 환원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송 시인은 현재 부산구치소에 수감 중이다. 그가 쓴 산문집 ‘꿈꾸는 자 잡혀간다’는 제목처럼.



"노동자 하나 돼라" 고 이소선 어머니



어머니를 잃은 노동자의 아픔은 컸다. 9월 전태일 열사 곁으로 돌아간 고 이소선 어머니가 올해의 인물 2위에 올랐다. 양대 노총 소속 응답자 10명 중 9명이 고 이소선 어머니를 올해의 인물로 선택했다.

고인은 생전에 늘 ‘노동자가 하나가 돼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정규직에게 온갖 차별로 고통 받는 비정규직과 하나가 돼라고 말했고, 양대 노총에는 한 몸이 돼라고 했다. 어머니가 가시는 날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그토록 원하시던 노동자의 단결과 통일을 보여 드리지 못한 불효가 심장에 박혀 눈물이 된다”고 통곡했고, 김영훈 위원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해야 한다는 말씀 가슴에 새겨,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해 싸우겠다"며 입술을 깨물었다.



돌아온 노동계의 이슈메이커



<매일노동뉴스>가 지난해 조사한 ‘2011 주목할 인물’에 선정된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이 올해의 10대 인물 3위에 올라 그에 대한 노동계 안팍의 관심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이 위원장은 총 62표를 얻었는데, 민주노총(0표)을 제외하고 대부분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택했다.

한나라당과의 정책연대 파기를 내걸고 1월 한국노총 위원장에 당선된 그에게 조합원들은 강력한 추진력과 용의주도한 협상력·정치력 등 이른바 ‘문제해결 능력’을 기대했다. 이 위원장은 한나라당과의 정치적 관계를 끝내고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개정 투쟁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11월 노조법 개정 투쟁 유보했다가 재개하면서 ‘예전의 이용득이 아니다’는 뒷말이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내년 총선과 대선을 앞두고 그의 선택에 노사정이 주목하면서 ‘뉴스메이커’임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현재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을 맡고 있는 이 위원장은 여러 차례 "임기 내 출마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내년 노동계의 가장 큰 변수 중 하나가 이 위원장의 정치적 행보라는 사실은 틀림없어 보인다.

노동부 출신 첫 장관에 오른 이채필 장관은 7위에 올랐다. 최근 완성차업계 장시간노동 문제에 칼을 뽑아든 그의 행보에 노사정의 눈과 귀가 쏠리고 있다. 지난해 올해의 인물 1위를 차지했던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올해 9위에 그쳤다. 그는 지난해 민주노총 선거에서 ‘노동계 40대 기수론’의 대표주자로 혜성같이 등장해 ‘변화와 혁신’을 내걸고 당선됐다. ‘젊은 민주노총’의 수장으로 노동계 안팎에서 기대를 모았지만 뉴스에서 민주노총이 점점 사라지면서 그의 존재감도 부각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 설문조사에서 민주노총 응답자들이 김영훈 위원장에게 던진 8표는 송경동 시인(11표)이나 희망버스 참가자(11표)·배우 김여진씨(10표)보다 적었다.



기존 질서를 무너뜨린 ‘대안’의 얼굴들



지방자치단체장이 올해의 인물 순위권에 진입하는 것은 꽤 드문 일이다. 4위를 차지한 박원순 서울시장은 노사정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양대 노총(68.4%)과 경영계(70%)에서 그를 올해의 인물로 선택했다. 박 시장은 당선되자마자 비정규직 정규직화·30억원 규모의 비정규센터 건립·서울시 산하기관 해고자 복직 검토 등 친노동 정책을 잇따라 쏟아냈다. 또 노동전문 보좌관 자리를 만들어 민주노총 출신 인사를 기용하고 노동계와의 대화채널도 적극 가동하고 있다. 재계가 이를 두고 “박 시장의 노동정책이 노동자 편향적”이라며 볼멘소리를 하고 나섰지만 노동자·서민 친화적인 서울시정은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7위에 랭크된 정동영 의원은 유일하게 10위권에 든 국회의원이다. 정 의원은 올해 2월 국회의원들이 가장 기피하는 상임위 중 하나인 환노위를 자처해 주목을 받았다. 이후 물불 안 가리고 노동현장을 누비면서 일약 스타로 떠올랐다.

물론 그의 좌클릭 행보를 미심쩍게 보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대통령후보를 지낸 그의 ‘튀는’ 행동을 선거공학적인 대선전략으로 바라본 것이다. 이에 대해 정 의원은 <매일노동뉴스>와의 인터뷰에서 “통렬한 반성의 시간을 보냈다”고 말했다. 성찰은 대선이 끝나고 9개월 뒤 리먼브러더스가 무너졌을 때 시작됐다고 한다. 이어 용산참사를 보면서 국가의 역할을 고민했다고 그는 말했다. ‘어디로 가야 하는가’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택한 답은 노동이었고,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정동영’이 됐다. 이번 조사에 참여한 국회의원 6명 모두 그를 올해의 인물로 꼽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고 있는 ‘나는 꼼수다’ 4인방(김어준 딴지일보 총수·정봉주 전 민주당 의원·김용민 시사평론가·주진우 시사인 기자)과 소셜테이너 배우 김여진씨, 그리고 희망버스 참가자가 나란히 10위에 올랐다. 이들은 스마트폰과 SNS를 타고 기존의 정치(조직)질서를 발랄하게 뒤집으며 우리시대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올랐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대선 후보들 10위권 밖에서 줄줄이 대기 중



10위권 밖 인물로는 안철수 서울대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13위)이 눈에 띈다. 10·26 재보궐선거에서 대한민국을 강타한 ‘안철수 현상’에서 노동계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정치의 해’로 접어드는 내년에는 순위권 진입도 예상된다.

공동 14위는 이명박 대통령·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청년유니온이 차지했다. 이어진 17위는 정연수 국민노총 위원장이었다. 정 위원장은 양대 노총에서 단 한 표도 얻지 못했지만 정부(56%)와 경영계(40%)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다. 제3 노총으로 불리는 국민노총은 현재 조합원 3만여명 규모의 ‘미니 노총’에 불과하다. 복수노조 설립 흐름과 함께 두 개의 대형선거 국면이 맞물리는 내년이 국민노총에게 결정적인 한 해가 될 것으로 보인다.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지, 본격적인 삼대노총 시대를 열지 주목된다.

이 밖에도 유력한 대선후보군인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18위)·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공동 19위)가 20위 내에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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