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칠성음료 용인공장에서 일하는 강아무개(54)씨는 가끔 낯선 기분을 느낀다. 27년간 자판기 유지·보수 일을 해 왔지만 이달 들어 생산설비 관리업무가 주어진 탓이다. 바로 옆에서 과거에 그가 하던 AS 업무를 하는 동료들을 지켜봐야 한다. 여전히 농담을 주고받고 밥벌이의 고충을 나누는 사이지만 서류상으로 이들은 남남이다.

강씨는 “아직 일이 손에 익지 않아서인지 예전에 하던 업무가 그립다”며 “얼마 전까지 함께 일하던 동료와 소속이 달라졌다는 생각에 묘한 이질감이 들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 10월 노조를 만들었다. 회사는 ‘업무 효율화’를 이유로 그가 속한 AS부서원 전체를 같은 그룹 계열사인 롯데알미늄으로 옮기려 했다. 부서원들은 크게 반발했다. 소속이 바뀌면 롯데리아 등에 공급하는 음료 판매기기까지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롯데알미늄은 그들이 하던 업무를 대리점에 위탁해 운영하고 있다. 롯데알미늄으로 가면 훗날 자신들이 비정규직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다.

강씨는 “기존 노조에 도움을 청했지만 별다른 해결책이 마련되지 않았다”며 “AS부서원 전체가 가입해 있던 노조를 탈퇴하고 새 조직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강씨는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노조가 생기자 탄압이 시작됐다. 난데없이 영업일이 맡겨지거나 집과 먼 공장으로 발령이 났다. 강씨는 조직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보고 민주노총 화학섬유노조에 가입했다.

그러자 사측은 조합원들을 개별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노조를 탈퇴하고 전적에 합의한 동료들이 속속 늘어갔다. 노조 설립 당시 123명이었던 조합원은 한 달 보름 사이 70여명으로 줄었다. 얼마 뒤 사측이 진전된 안을 내놓았다. 영업이나 생산시설 관리 등으로 업무가 변경된 채 회사에 남거나 회사를 옮겨 기존해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내용이었다. 기존의 업무강도와 고용조건을 보장하겠다고 했다. 50여명이 전적을 택했다.

강씨는 지난달 말 마지막까지 남은 조합원들을 소집했다. 노조 유지 여부를 물었다. 그는 "노조 유지를 원하는 조합원은 거수로 의사를 표시하라"고 했다. 그런데 조합원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조합원들은 2천여명이 가입한 기존 노조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조직을 유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강씨는 “주위에선 ‘그 정도면 이긴 싸움’이라고 하지만 마음이 여간 착잡한 게 아니다”며 “회사의 무리한 방침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조합원들의 선택이 노조 해산이었던 셈”이라고 말했다.

며칠 후 강씨는 화섬노조 사무실을 찾았다. 한 손엔 탈퇴서가 들려 있었다. 서류를 건네면서 마음 한구석에서 미안한 마음이 솟구쳤다. 머뭇거리는 그에게 화섬노조의 한 간부가 “수고했다. 언제든지 민주노총을 이용해 달라”고 말했다. 강씨는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며 “저절로 ‘훗날을 기억하자’는 말이 나왔다”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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