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선 공인노무사

산재사건을 진행하다보면 답답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정말 산업재해로 인정돼야 할 사건이지만, 입증할 자료도 없고 회사의 도움도 없는 경우가 그렇다. 이런 상황은 산업재해보상보험법(산재법) 상 ‘업무상재해’를 당했음을 주장하는 근로자가 입증(증거 등을 마련해 증명하는 일)까지 해야 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이를 바로 ‘입증책임’이라고 한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입증책임’이 근로자에게 얼마나 무거운 짐인가 알 수 있다. 내 몸이 아파 치료에 전념해도 모자랄 판에 의학적 지식과 관련정보도 없이 어떻게 증거자료들을 모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난감한 경우는 근로자의 상병에 따라 더 곤란해지기도 한다. 상병이 업무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는 질병일 경우가 그렇다. 이런 경우 업무상재해임을 입증하기 위해 근로자측은 해당 업무가 얼마나 힘든 업무였는지, 이런 사건이 발생하기 전 재해자에게 급격한 과로와 스트레스가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입증해야 한다.

지난해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제도가 시행되면서 단체협약으로 보장받던 전임자급여의 지급이 중단되거나 이미 체결한 단협에 전임자급여 지급조항이 있다는 이유로 재교섭을 요구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노조 탄압이 진행됐다. 법률원에 의뢰가 들어온 사건도 이 같은 사용자의 행위로 인해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은 상태에서 과로가 겹쳐 쓰러진 한 노조 간부(A씨)의 일이다.

A씨는 단협 상 전임자로 지난해 4월부터 회사측과 단체교섭을 진행했다. 그는 2010년 7월1일 법이 시행되기 전에 단협을 체결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해 6월 말 단협이 체결됐다. 그런데 회사는 “새로 체결된 단협에 포함돼 있는 전임자급여 지급조항이 법에 위반되므로 급여를 지급할 수 없다”며 단협을 파기했다. 이로 인해 A씨를 비롯한 노조 전임간부들은 7월부터 급여를 받지 못하게 됐다. 그 뒤 회사측이 조합원의 고용과 직결되는 각종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하면서 노-사는 추가교섭을 벌이게 됐고, A씨는 교섭 준비를 위해 거의 매일 연장근무를 하게 됐다.

중소 사업장의 경우 전임간부의 수가 적어 한두 명의 전임간부가 일상적인 조합 활동뿐 아니라 교섭의 준비·대응·간담회·각종 회의까지 수행해야 한다. 전임간부에게 업무의 과부하가 걸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A씨 역시 지난해 6월 단협을 체결하기까지 매일 16시간 이상 근무했고, 협약이 파기된 후에는 재교섭을 위해 연장근무를 계속 했다. 급여가 나오지 않은 7월부터는 생계문제에 대한 스트레스까지 가중됐다. 이처럼 상시적인 과로와 스트레스에 노출됐던 A씨는 결국 회사 내 화장실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채 발견됐다.

그러나 근로복지공단과 법원은 “A씨가 겪은 금전적인 스트레스는 예상 가능했던 것으로 심하지 않았을 것이고, 상당한 과로를 했다는 것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며 A씨가 낸 업무상 요양신청을 기각했다. 현재 이 사건에 대한 항소심이 진행 중이다.

문제는 A씨가 새롭게 제출할 수 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는 점이다. 도대체 노조간부의 연장근무나 과로를 입증하기 위해 제출할 수 있는 자료가 얼마나 더 있을까(1심에서 A씨의 업무일지·동료들의 확인서·노조 교섭일지 등 상당한 자료를 제출했으나 근로복지공단은 이 모든 것이 객관적 자료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법원 역시 추가적인 입증을 요구하며 공단의 손을 들어줬다).

현재 노동계를 중심으로 재해자에게 입증책임을 부여하고 있는 현행 산재법을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이 진행되고 있다. 업무상재해 중 직업병에 대한 입증책임을 공단과 재해자가 나눠지자는 것이다. 현대의 산업재해는 재래형 재해 외에도 각종 직업병·과로성 질병이 포함돼 있다. 산재에 대한 입증책임 전환으로 업무상재해를 당한 근로자가 안심하고 걱정 없이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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