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노무사
(법률사무소 참터)

‘쿵’하고 모텔방 현관문이 육중하게 닫히면서 안에서 자동으로 찰칵하고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내륙지역의 소도시인지라 난방을 하고 있는 것 같아도 방안은 을씨년스럽다.

사람들은 노무사라는 일이 의뢰인을 만나 상담을 하거나 필요한 문서를 작성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업무시간을 그런 일을 하면서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정작 노무사는 일하는 시간의 대부분을 운전을 하거나 기차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보낸다. 공장들이 대부분 지방도시에 자리잡고 있고, 그래서 노동자들을 만나려면 가급적 현장으로 가야 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대충 몸을 씻고 텔레비전을 켰다. 멍하게 응시하면서 고민에 빠진다.

“일을 할까? 말까? 아, 힘든데….”

고단하지만 다시 가방을 열어 주섬주섬 노트북을 꺼낸다. 문뜩 가방 안을 보고 피식 웃음이 난다. 이제는 제법 이력이 붙은 출장용 가방이다. 가방 안에는 일정에 맞춘 옷가지와 세면도구·전기면도기가 한켠에 웅크리고 있고, 나머지는 공간은 일과 관련한 것들이 차지하고 있다. 원래 짐의 대부분은 서류뭉치다. 결국 잘 들여다보지도 않으면서 마음의 위안을 삼고자 들고 다니는 것 같다. 내 기억력을 잘 믿지 못해서일 수도 있으리라. 그래도 얼마 전 회사에서 없는 살림에 태블릿피시를 하나씩 장만해 준 덕에 대부분의 문서는 이제 파일로 만들어 넣어 다니면서 본다. 어깨가 한결 가벼워 졌다. 한동안 오른쪽 어깨에 결림이 있었는데 이제 좀 나아지리라 생각하고 있다.

아무리 뭐래도 내 출장패키지 중 중요도 1위는 노트북이다. 노트북은 쓸모가 정말 많다. 기차를 타고 이동할 때나 누군가를 기다릴 때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서 평소에 부족한 문서작업을 할 수 있다. 물론 시간이 길게 드는 일은 못하겠지만 간간이 있는 칼럼 쓰는 일이나 의견서 같은 것을 검토하는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쓸모는 상담기록이다. 혹자는 상담하면서 앞사람이 노트북으로 문서를 작성하고 있으면 조사받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상담내용을 각종 서면으로 호환하는데 시간을 단축시키고, 악필을 스스로 못 알아보는 사고를 방지해 주는 터라 이만한 쓸모가 없다.

노트북은 상담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것이 좋다. 일을 하다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컴퓨터를 켜야 하는 일이 많다. 다방이나 노래방은 이미 익숙한 장소이고 낮 시간 청소가 한창이던 나이트클럽 테이블이나 국도 휴게소 주차장 1톤 트럭 안, 폐쇄된 공장 안 기계 위, 소금공장의 소금창고 관리실 안도 나에게는 작업장이다. 대부분 노조가 없고,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의뢰인들을 만나면 장소를 불문하고 빨리, 많은 이야기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과감하게 노트북을 켜야 한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가볍고 배터리가 오래가는 노트북이 필수적이다.

사실 그래서 출장물품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배터리다. 출장용 물품의 선택에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무게와 활용도의 오묘한 균형점을 찾아내는 것 아니겠나. 무게는 최대한 가볍고 쓸모가 많아야 한다. 특히 노트북 같은 경우에는 배터리 무게가 노트북의 무게를 좌우하기 때문에 더더욱 진지한 고려가 필요하다. 사실 한참 상담 작업을 하다가 노트북이 꺼지는 경험을 적지 않게 해 봤기 때문에 2년 전에 지금 쓰는 노트북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배터리 용량이었다.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고 노트북을 켤 때면 가장 먼저 배터리를 확인하는 버릇이 생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마감해야 하는 문서를 열어 눈대중으로 살펴보다가 마우스를 움직여 배터리 아이콘에 갔다 대기 일쑤다. 배터리가 얼마나 남았을까하고 습관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이미 낮에 2~3시간 상담을 하면서 썼는데, 5시간 넘게 버틸 수 있다는 표시가 나오면 속으로 쾌재를 외친다. 그 때 느끼는 뿌듯한 마음이란, 이 녀석의 뒷심이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생각해 보니 출장이 잦은 나에게 ‘머스트해브 아이템’(필수 품목)은 바로 이 녀석, 충전식 배터리(Rechargeable battery)다.

예전에 영어공부를 한답시고 이래저래 단어를 외워댈 때의 기억으로 흔히 재충전이라고 알려진 ‘Rechargeable’의 본디 의미는 총알을 다시 총에 끼우는 ‘재장탄’이나 다시 적을 공격한다는 의미인 ‘재공격’이다. 다소 호전적인 의미인 재습격이나 재장탄이라는 말이 다 써버린 배터리를 다시 충전해 쓰는 충전식 배터리의 재충전이라는 말을 표현하는 데에도 쓰였는지는 알 길이 없다.

현대의 산업사회에서 노동은 한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기초가 된다. 그런데 노동은 그 사회를 구성하는 인간들에 의해 제공되는 것으로 자본이나 토지 같은 재화와는 다른 성질을 갖는다. 바로 노동은 인간에 관한 깊은 성찰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사회에서 원칙적으로 평등하고 동등한 지위를 갖기 때문에 사회는 이러한 균등성이 파괴되지 않도록 이를 보호할 필요가 있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헌법은 인간의 존엄성을 선언하고 있다.

하지만 산업화는 경제 질서 아래에 있는 인간사회의 서열화를 필요로 한다. 약자와 강자는 필연적으로 나뉘고, 강자에 의해 지배되는 질서에서 약자의 반격은 허용될 수 없다. 그것이 강자의 룰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 질서의 과잉상태는 항상 인간존중 사회와 충돌했고, 역사 속에서 민중들의 혁명적 행동은 이런 충돌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노동법이 그 국가에서 어떤 지위를 부여받는가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어떤 국가에서 노동법은 국가의 헌법적 이념을 실현하는 중요한 법률이다. 따라서 그 법을 지키는데 소요되는 비용은 당연히 국가를 운영하는데 필수적인 비용으로 인식된다.

반면 어떤 국가에서는 노동법이 경제 질서의 운용에 필요한 수단으로 인식된다. 이런 경우 노동기본권은 선언에 그치고 구체적인 법률은 노동권 보호보다 노동권 행사의 제약을 내용으로 담는 경우가 많다. 노동법의 지위가 노동권 보호 수준으로 올리기까지 많은 사람의 희생이 필요했다.

우리는 지난 수십년간 강력한 경제발전·경제위기 이데올로기 아래에 있는 노동법을 경험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노동법은 전태일을 비롯한 수 많은 열사를 낳았고, 민주노조에 대한 탄압의 역사를 낳았으며,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양산을 허용해 왔다. 그러면서도 노동법은 항상 경제 질서 아래 노동의 문제를 두고 그 수준에서 문제해결을 도모해 왔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법의 개정에 일희일비하는 대응수준을 넘어 노동법의 사회적 지위에 대해 논할 필요가 있다. 노동법 자체에 어떤 지위를 부여하고 얼마나 단단한 사회적 합의를 확보하며, 사회적 협치의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국가에 국민이 근로할 권리를 이야기하면서 국가의 고용정책을 압박하고, 근로의 최저기준을 정하도록 한 국가의 의무를 들어 양질의 일자리를 요구해야 한다. 최저임금 보장을 얘기하면서 실질소득 보장을 말하고, 노동3권을 얘기하면서 경제사회에서 노동자의 민주적 권리를 말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노동법을 실질적으로 얻어내야 한다. 그것이 목표가 돼야 한다.

그래서 지금 나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머스트해브 아이템’은 ‘Recharg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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