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상사 모친의 장례식을 돕다 갑자기 간질이 재발해 숨졌다면 업무상재해일까 아닐까. 법원은 고인이 총무팀장으로서 업무의 일환으로 장례식을 진행한 만큼 간질 발작에 의한 질식사를 업무상재해로 봐야 한다고 판결했다


유족 “회사지시에 따른 장례식 진행, 업무상재해”

영화제작사 총무팀장으로 근무하던 박아무개씨는 대표이사의 모친이 숨지자 회사 지시에 따라 장례식 행사를 총괄하게 됐다. 하지만 박씨는 사망 무렵 시사회 준비와 정기 주주총회 준비 등의 이유로 초과근무와 휴일근무 등을 진행하며 과로가 누적된 상태였다. 여기에 장례식까지 총괄하게 되자 3일간 연달아 밤을 세며 수면 부족에 시달렸다.

회사는 장례식 지원을 위해 다른 행사를 모두 연기하고, 임직원들로 하여금 퇴근시간 이후는 물론 근무시간에도 장례식 행사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장례식 행사와 관련해 직원들이 지출한 교통비와 식사비 등의 비용은 모두 회사가 지원했다.

박씨는 장례식장에서 조문객 안내와 접대 등을 비롯한 장례절차를 진행하던 중 갑자기 쓰러졌다. 바로 응급실로 이송됐으나, 간질 발작의 재발에 따른 질식사(추정)로 사망했다. 앞서 그는 서울 신촌의 연세의료원 등에서 간질·당뇨·비만 등으로 정기적인 통원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사망 전 3년5개월 동안은 간질 증세의 재발이 없는 건강한 상태를 유지했다. 이에 박씨의 유족은 “업무상재해로 숨졌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 및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다.


공단 “사적인 업무, 과중한 스트레스 아니다”

공단측은 “공적인 업무가 아닌 사적인 업무를 진행하다 사망해 사망과 업무 사이에 인과관계가 인정되지 아니한다”며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을 내렸다. 공단은 이어 “고인의 업무가 통상의 정도를 넘을 만큼 과중하거나 심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줄 정도라고 보이지 아니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공단 자문의도 힘을 보탰다. 자문의는 소견서를 통해 “박씨의 사인으로 추정되는 질식사는 간질 발작에 의한 것으로 장례식 동안 거의 잠을 자지 못하고 계속해 일을 한 것이 간질 재발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판단된다”며 “이 같은 간질 발작은 업무와 인과관계가 없어 고인의 사망은 업무상재해로 인정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에 유족은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은 원고 승소판결을 내렸다.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재판장 신동승 부장판사)는 공단에게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을 취소하고 소송비용을 부담하라고 선고했다. 박씨가 사적인 동기로 장례식 행사를 진행한 것이 아니라 회사 총무팀장으로서 업무의 일환으로 장례식 업무를 진행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법원 “장례식 진행 업무일환, 간질 악화”

법원은 “고인은 회사 업무 과중에 따른 육체적 정신적 과로와 이로 인한 스트레스에 의해 사망했거나 혹은 이 같은 과로와 스트레스가 고인의 기존 질환인 간질을 자연경과 이상으로 악화시켜 사망에 이르게 한 것으로 보인다”고 판시했다.

법원은 △고인이 회사 결정에 따라 장례식 진행 업무를 수행하고 △장례식 전체 조문객 1천여명 중 회사업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조문객들만 317명에 이르고 △회사가 조문객 명단을 작성해 직접 관리하고 △고인의 업무 내용이 장례식으로 인해 급격하게 변경돼 일시적으로 과도한 업무상 부담이나 스트레스를 줬고 △수면부족·과로·정신적 스트레스가 간질 발작의 주된 유발요인 중의 하나인 점 등을 근거로 제시했다.

[관련판례] 서울행정법원2006구합42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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