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노무사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산재 판정기관은 근로복지공단이다’는 말은 형식적으로 맞지만 실질적으로는 맞지 않다. 그 이유는 바로 역학조사 때문이다. 안전보건공단 산하 기관인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하 산보연)이 역학조사를 실시해 실질적인 직업병 인정 주체로서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관련 ‘요양업무처리규정’ 제9조는 ‘업무상질병 여부에 대한 자문의뢰’라는 제목하에 "소속기관장은 근로자의 질병이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면 산업안전·산업보건 연구를 담당하는 기관, 직업성폐질환연구소 등 업무상질병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관련기관이나 단체에 자문 또는 역학조사를 의뢰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즉 ‘화학적·물리적 요인에 따른 직업성 암, 집단적으로 발병한 질병으로 질병의 발생 원인을 추정하기 곤란한 경우, 업무상질병의 인정기준이 마련돼 있지 아니하여 업무상재해 여부의 판단이 곤란한 경우’에 대해 일부 폐질환을 제외하고 근로복지공단은 산보연에 역학조사를 의뢰하게 된다.

이로 인해 실제 사업장에 유해화학물질이 있는지, 노동자의 직업병이 발병될 가능성이 있는지 등 주로 ‘의학적 인과관계’에 초점을 맞춰 산보연 직업병연구센터에서 역학조사를 수행하게 된다. 이후 역학조사평가위원회를 거쳐 업무상질병인지 여부를 판단하고, 판단 결과를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에 송부한다. 이에 따라 질판위와 공단은 사실상 산보연의 역학조사 결과에 구속되고 이에 반하는 처분을 하지 못하고 있다.

산보연의 모태는 지난 92년 개원한 산업보건연구원이며, 이 연구기관은 정부의 독자적 의지로 직업병 연구와 산재예방을 위해 설립된 것이 아니다. 88년 15세 나이에 수은중독으로 사망한 문송면군 문제와 원진레이온 투쟁 등 직업병과 노동조건의 열악함이 알려져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면서 정부가 이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설립된 측면이 있다.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산보연은 정부 공인기관으로 매년 ‘직업병진단사례집’ 발간을 비롯해 상당히 많은 연구와 보고서를 발간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문제는 바로 이 역학조사를 담당하는 산보연이다. 왜냐하면 산보연의 역학조사가 항상 업무상재해 법리에 충실한 것이 아니며, 법률 등의 한계를 지적하지 못하고 ‘과학’과 ‘전문가주의’로 당사자가 납득할 만한 충실한 조사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지난 삼성 백혈병사건에서 산보연이 실시한 두 번의 역학조사의 부실성이 행정법원에서 사실상 인정된 바 있다. 그뿐 아니라 이전 백혈병 사안에 있어 산보연은 업무기인성을 부정했지만 대법원(96누14883판결, 2008두3821 판결) 등에서 업무상질병으로 인정돼 이미 역학조사의 한계가 지적된 바 있다. 올해 초 서울고등법원에서 확정된 여수건설노조 비계공사건(2010누9183판결)에서도 ‘석면노출력은 인정되나 CT상 석면폐가 인정되지 않는다’라는 산보연의 역학조사에 따라 불승인됐으나, 이러한 산보연의 주장이 국제기준에 맞지 않다는 연구 및 논문 등의 감정회신에 근거해 업무상재해로 인정됐다.

문제는 산보연이 역학조사라는 핵심기능을 담당하고 있지만 이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라는데 있다. ‘산보연은 역학조사만 담당하고 실제 산재 판정기관은 공단’이라는 논리는 책임 회피에 가깝다. 또 산보연은 역학조사에서 불승인된 사안이 왜 법원에서 인정되는지에 대한 고민과 문제의식이 부족하다. 산재인정법리가 ‘의학적 인과관계’가 아닌 ‘상당인과관계의 법리’라는 인식이 전제돼야 하고, 법원에서 직업병으로 인정된 사안에 대해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또 요양업무처리규정상 산보연만이 ‘역학조사를 독점함’이 아니며, 실제 산재 신청 사건에서도 서울대학교 보건대학원에서 역학조사를 한 사례가 있음을 참조해 재해 노동자의 요청이 있을 경우 타 기관에서도 이를 할 수 있도록 개방적으로 운영되는 것이 필요하다. 이어 산보연의 역학조사 내용이 개인정보를 노출하지 않는 한에서 역학조사보고서 전문을 발간하고, 이에 대해 관련 이해 당사자와 외부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역학조사 과정과 심의평가 과정, 그리고 산보연 운영의 문제에서도 참여와 감시를 받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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