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보건의료인력법을 제정해 안심의료를 실천하고 노동자도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병원을 만들겠습니다. 만성적인 병원인력 부족 문제 해결은 고령화 시대에 대비해 질 높은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좋은 일자리를 만드는 데도 기여할 겁니다."

유지현(43·사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 당선자의 말이다. 유 당선자는 지난달 23일부터 25일까지 조합원 직선으로 치러진 6대 지도부 선거에 단독출마해 94.4%의 찬성률로 당선됐다. 임기는 내년 1월부터다.

유 당선자는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영등포 노조사무실에서 <매일노동뉴스>와 만나 높은 지지율로 당선된 비결에 대해 "5대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며 인력법 제정사업에 주력했던 것에 대한 조합원들의 기대가 반영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보건의료인력법 제정을 마무리하고 조합원들의 희망을 실현하고자 위원장으로 나섰다"며 "법 제정을 사회적 투쟁으로 만들어 국민과 병원노동자들의 건강권을 지켜 내겠다"고 강조했다.


보건의료노조 역사의 산증인

 

▲ 정기훈 기자

선거 기간 내 현장순회를 하는 동안 그를 잘 모르는 조합원들은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151센티미터의 작은 키에 반달 눈웃음을 달고 다니는 그에게 일부 조합원들은 '투쟁이나 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그러나 유 당선자의 이력을 알면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지지를 보냈다.

지난 90년 고려대병원 간호사로 입사한 유 당선자는 4년차가 됐을 때 의사의 간호사 폭행사건에 맞서 간호사 대표자로 활동하다 동료들의 권유로 노조간부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노동운동을 안 했다면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고 있었을 것"이라며 "지금의 적극적인 성격은 노동운동을 통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했다. 내성적이라는 자기소개와 달리 유 당선자는 96년 병원노련 시절 고대의료원노조 5대 위원장에 당선돼 보건의료노조 건설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98년부터 노조 서울지역본부 교육부장으로 전임을 시작해 경희의료원과 가톨릭병원의 장기파업 투쟁을 함께했다. 이어 노조 3·4대 서울본부 본부장을 하면서 산별교섭 실무교섭단으로 활동했다. 2009년부터는 5대 노조 사무처장으로 활동했다. 의료공공성강화위원장과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이의신청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유 당선자는 "지부장·본부장·사무처장 등을 거치며 기획과 실무 조직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갈등을 조정하고 사람을 아울렀던 경험이 위원장 역할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환자·노동자 살리는 인력법 제정해야"

그는 내년 1월 임기 시작과 함께 보건의료인력법 제정을 위한 투쟁에 나설 계획이라고 했다. 보건복지부 산하에 병원 인력문제를 총괄하는 위원회 설립을 골자로 하는 보건의료인력법을 발의하고, 내년 상반기까지 구체적인 인력기준을 만들기 위한 현장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이어 내년 총선·대선에서 법안을 지지하는 후보들과 정책협약을 맺고 선거운동에 나설 방침이다.

“흔히 병원하면 의사와 간호사만 생각해요. 하지만 병원 지하부터 옥상까지 구석구석에서 환자의 생명을 살리는 데 관여하는 다른 직종의 수많은 노동자들이 있어요. 이들이 없어 전기가 1초만 나가도 환자들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만성적인 병원 인력난이 심해지고 있는데도 이들을 포괄해 관리하는 법조차 없는 실정입니다.”

병원노동자들은 지난 5년간 산별노조 요구안 1순위로 병원 인력문제 해결을 꼽았다. 지난해 복지부가 발표한 자료에서도 병원 간호사 인력이 2만2천여명 부족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 간호사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권이다. 다른 직종인 의료기술·사무행정·시설관리직도 마찬가지다. 병원업무의 특성상 인력난은 노동문제를 넘어 환자 안전과 직결되는 중요한 문제다.

유 당선자는 “정부의 관리 부재로 인력난이 한계에 달해 질 좋은 의료서비스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해지고 있는 상황”이라며 “환자와 노동자를 살리는 투쟁을 국민과 함께 만들어 가겠다”고 말했다.


“한국판 산별노조 만드는 제2의 산별노조 운동 전개”

산별노조로서 사회적 위상과 역할을 정상화하는 운동도 전개한다. 보건의료노조의 산별교섭은 지난 2009년 사용자단체 해산으로 중단된 뒤 답보상태에 있다.

“사회적으로 노조에 대한 관심이 떨어지면서 산별운동도 잠시 숨을 고르며 쉬어 가는 단계라고 생각해요. ‘산별만능론’혹은 ‘현실을 무시한 평가절하식 비난’을 오가는 양 극단의 시각을 넘어 한국적 상황에 맞게 산별노조를 재편해 보는 제2의 산별노조 운동을 벌일 겁니다. 조직 확대가 왜 안 되고 있는지, 왜 임금의 하향평준화가 됐는지 등 그간의 시행착오를 점검하고 산별노조가 제 기능을 다할 수 있도록 정상화하는 방안을 조합원들과 함께 찾겠습니다.”

이를 위해 유 당선자는 산별단협효력을 확장하고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 대상에서 산별노조를 제외시키는 등 산별운동의 공간을 더 넓힐 수 있는 법·제도 개선투쟁을 전개할 생각이다. 의료공공성을 강화하기 위해 대정부 교섭을 다각화해 산별노조의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도 힘을 쏟을 방침이다.


“24시간 불 켜진 노조사무실, 행복한 공간으로”

유 당선자는 산별노조 정상화를 위해 ‘현장 복원’을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그는 “신구 세대를 이어 줄 중간허리 간부들이 육성되지 않아 고민”이라며 “조직이 발전하려면 많은 젊은 현장 간부들이 성장해 중앙으로 올라오고 제 역할을 해 줘야 하는 만큼 이들을 육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허리가 없는 현상은 노조 중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노조에는 젊은 상근자들이 과로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노조를 떠나고 있다. 노조는 노동계에서도 일이 많아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사무실로 유명하다. 급여 수준도 낮다. 업무 효율화를 위한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더 이상 상근자들에게 희생과 헌신을 요구할 수 없는 한계에 달한 것 같아요. 지부·본부·중앙의 일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고 상근자들이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논의 중에 있습니다. 현장 조합원들과 충분한 토론을 통해 모두가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볼 예정입니다.”

한미FTA 폐기 투쟁부터 의료공급체계 정상화, 무상의료사업 등 국민과 함께하는 싸움도 그를 기다리고 있다. 유 당선자는 “이명박 정권하에서 노조활동이 그 어느 때보다 어려웠지만 이제 새로운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며 “제2의 정치세력화를 전개해 정치가 희망이 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 환자와 국민이 함께 하는 노조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사람 보듬어 합창 이끌어 내는 지휘자 되겠다”

유 당선자는 취임 직후 2박3일 간 정책대의원대회를 개최할 생각이라고 했다. 현장 조합원들과 토론을 통해 사업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해서다. 특성별·직종별 요구를 책임지는 현장 정책위원을 선임하고 조합원 간담회 정례화 등을 추진해 현장과 소통을 강화할 예정이다.

“5대 지도부를 평가하는 자리에서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참 아팠어요.(웃음)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자리이다 보니 주변을 둘러보기보다는 앞만 보고 돌진을 강행했죠. 사무처장은 그래야 되는 줄 알았어요. 이젠 ‘나를 따르라’ 라는 수직적 리더십 대신에 소통하고 보듬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유 당선자가 제시한 리더십의 키워드는 ‘합창’이었다. 그는 “합창은 잘하는 사람과 못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어우러져 하모니를 이뤄야 한다”며 “조합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포용해 4만 조합원의 하모니를 이끌어 내는 지휘자가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