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우람 기자

“예전엔 노동운동 하면 무서운 생각부터 들었어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본 노동자들이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몸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런 이미지였거든요.”

서른 무렵 서울로 상경한 한 여성 노동자는 마흔을 넘겨서야 노조를 접했다. ‘떠밀려’ 시작한 노조 활동은 의외로 그의 의식과 적성에 꼭 들어맞았다. 1회용 주사기를 생산하는 김혜숙 민주화섬노조 한국메디칼사푸라이지회 지회장(55·사진)의 얘기다.

<매일노동뉴스>는 지난 25일 오전 서울 가산동 메디칼사푸라이 사업장 지하에 있는 노조사무실에서 김 지회장을 만났다. 그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 발을 디딘 건 98년 10월. 그전엔 공무원인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며 보험설계사나 간단한 파트타임 생산직으로 일한 것이 전부였다. 입사 후 그에게 처음으로 맡겨진 업무는 1회용 주사기를 포장하는 일이었다.

“생산라인 끝으로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제품을 포장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아침부터 밤까지 기계적인 일을 반복했습니다. 예전에 했던 일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다 아, 이게 바로 노동자라는 거구나 싶었죠.”

점심시간이 돼서야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은 40분밖에 되지 않았다. 급하게 끼니를 때워도 동료들과 차 한잔 마시기 힘들었다. 오전·오후에 한 차례씩 10분의 휴식시간이 있었지만 위생관리를 철저히 하는 작업의 특성상 방진복과 위생모자를 갈아입는 데도 모자랐다.

김 지회장은 "회사에 대한 불만이 자연스럽게 입에 붙었다"며 "어떻게 알았는지 노조에서 ‘함께 바꿔 보자’고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입사 2년 만에 얼떨결에 노조 조직부장이 됐다. 당시만 해도 노동운동 자체가 어색했다. 방송과 주위에서 들은 안 좋은 얘기 때문에 노동운동에 대한 어렴풋한 거부감도 있었다. 그래도 뭔가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언제부턴가 노조간부들의 얘기에 자주 고개를 끄덕였고, 어느 순간 정신을 차려 보니 한쪽 발을 이미 그곳(노조)에 담그고 있었다고 했다.

“일단 공부부터 하라는 언니들의 말에 이런저런 교육을 받기 시작했어요. 근데 기초가 부족해선지 무슨 말인지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더군요. 그래도 기계 같은 일상에서 벗어나 집회에 참석할 때면 기분이 그렇게 좋더라고요. 2003년에 처음으로 가 본 여의도 전국노동자대회를 잊을 수 없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곳에 모였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머리보다 가슴으로 먼저 노동운동을 받아들인 김 지회장은 2005년부터 1년간 노조 사무장을 맡았고, 2006년 지회장이 됐다. 노조가 민주노총 화섬노조 소속 지회로 가입한 것도 이 무렵이다.

지회장 취임 첫해부터 그에게 버거운 과제가 주어졌다. 당시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던 주 5일제를 그들의 일터에도 도입하려 했던 것이다. 주 5일제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사업장 규모별로 단계적으로 시행됐지만 세부내용은 노사교섭에서 정해지던 시절이었다. 회사측은 "주 5일제를 도입하는 대신 그만큼 휴식일을 깎겠다"고 맞섰다.

“산별노조와 대각선 교섭을 펼치고 수차례 교섭·결렬을 거쳤죠. 지노위에도 조정을 신청했고요. 그래도 안 되겠다 싶어 매일 출근시간을 30분 앞당겼습니다. 전 조합원이 공장 앞마당에서 준법투쟁을 벌였어요. 한 달하고 보름이 지나자 회사가 양보를 하더군요.”

김 지회장은 "지회장이 되면서 반드시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고 말했다. 점심시간을 40분에서 1시간으로 늘리는 것이었다. 지회에 따르면 회사는 점심시간 1시간이 마치 '최후의 고지'라도 되는 것처럼 '추가 20분'을 부여잡고 있었다.

그는 세 번째 지회장 임기가 시작되는 올해만큼은 점심시간을 1시간으로 바로잡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6월부터 시작된 임금·단체협상을 앞두고는 상급단체와 머리를 맞대고 협상전략을 짰다. 임단협에서 기본급 인상과 정년연장이 주요하게 다뤄졌지만 점심시간도 쟁점 중 하나였다. 예상했던 대로 회사측은 지회의 요구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 지회장은 파업을 택했다.

“지회 간부들과 추석연휴를 반납하고 회사 앞마당에 텐트를 쳤어요. 함께 먹고 자며 파업계획을 짰습니다. 옛 노조와 지회 설립 이후 처음 있었던 일이었죠. 파업 출정식 때는 조합원들은 물론이고 노조 소속 수도권 간부들이 대부분 함께했어요. 그랬더니 회사가 3일 만에 백기를 들더군요. 연대의 힘이 무서웠던 거죠.”

한때 노조 활동에서 빠지기 위해 야간근무조를 기웃거리기도 했다는 김 지회장은 "이제는 눈앞에 다가온 정년이 아쉽다"고 말했다. 노조 활동을 늦게 시작해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2년 후면 정년이 되기 때문이다.

“처음 조합원들 앞에서 했던 말이 생각나요. ‘나는 흰 도화지다, 대학도 안 나왔고 노동운동이 뭔지도 모른다, 다만 노력해서 백지 위에 멋진 그림이 그려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이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하잖아요. 남은 임기도 이것저것 재지 않고 조합원들을 위한 조직이 되도록 노력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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