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훈 기자 photo@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은 정리해고 투쟁을 의미하는 고유명사가 됐다. 인기가 얼마나 높은지 ‘올해의 히트상품’에 뽑히고도 남을 수준이다. 신문 사회면을 꼼꼼히 보는 사람이라면 크레인 운전실의 높이가 35미터라는 것쯤은 가뿐히 기억해 낼 것이다. 예민한 감성의 소유자라면 크레인 주위를 맴도는 영혼들의 울음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르겠다. “박창수·김주익·곽재규를 아느냐”는 한 국회의원의 격앙된 눈빛과 목소리가 TV로 생중계되는 세상이니 말이다.

한때는 위용을 자랑하던, 어떤 때는 사람들의 간을 졸이게 하던 이 골리앗 크레인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한진중공업은 부산 영도조선소의 시설을 현대화한다는 이유로 30년 넘게 사용돼 온 85호 크레인에 대한 철거작업에 들어갔다. 물건을 끌어올리는 케이블을 매다는 지브가 해체되고, 운전실과 기계실이 차례로 철거될 예정이다.

85호 크레인에 대한 모든 것을 적은 치부책이 있다면, 그 마지막 장에는 박영제(54)·박성호(49)·정홍형(48)에 대한 기록이 남을 것이다. ‘나는 활동가다’라는 프로그램이 생긴다면 ‘명예졸업’쯤은 일도 아닐 것 같은 그들을 만나고 온 느낌은 한마디로 ‘견결하다’였다. “김진숙을 살리기 위해” 그것뿐이었다. 육중한 쇳덩이에 사람의 기척을 전하는 것이, 그래서 기어이 죽지 말고 살아서 내려가자는 것이 그들 앞에 놓인 사명이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증명하고 있는 ‘운동판’에, 아직 이런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오히려 생경하게 느껴졌다. <매일노동뉴스>가 85호 크레인의 마지막 3인을 만났다.


“행님, 그만 주무시고 일어나이소”

지난 24일 오전 부산 사하구 당리동의 한 병원 3층 간호실.

“저기, 박영제·박성호·정홍형씨 만나러 왔는데요. 병실이 어디죠?”

그들이 입원한 병실이 308호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간 길이었다. 하지만 병실 앞에 섰을 때, 다른 병실과 달리 308호 명패에는 아무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입원해 있다는 309호실도 마찬가지였다. 기자질을 하다 보면 별 영양가 없는 촉이 발달하곤 한다. 이날도 그랬다. 무명의 명패는 ‘관계자 외 출입금지’처럼 보였다. 이런 날은 심호흡 한 번 하고, ‘흠~ 흠~’ 목 한번 풀어 주는 요식행위가 필요하다. 그러면서 판단해야 한다. “자, 저도 알 만큼 알거든요. 술술 말씀들 해 보시죠”라며 냉풍버튼을 누를 것인지, “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살살 대해 주세요”라며 온풍버튼을 누를 것인지…. 본능은 후자를 택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병실 문을 여니 훅~ 하고 밀려오는 것은 알코올 냄새가 아닌 발 냄새였다. 직사각형의 병실, 침대 네 개가 조르르 놓였다. 저쪽 창가 바로 아래 침대에 한 명, 바로 그 옆 침대에 한 명이 창쪽을 향해 누웠다. 분명히 “안녕하세요~”라는 서울 아가씨의 상냥함을 가장한 인사 소리를 들었을 터인데, 미동조차 없다.

머리에 까치집을 지은 박성호씨가 겸연쩍은 웃음을 띠고 기자를 맞았다. 귤 두 개를 먹으라며 건넨다. 그러면서 “행님, 그만 주무시고 일어나이소” 한다. 그러면서 “아직도 크레인인 줄 아는가베. 아침나절엔 늘 잠이네예” 한다.


“저런 이와 어울렸다간 내 신세만 버리지”

박성호가 누구인가. 82년 수산고등학교 3학년 때 실습 나온 영도조선소가 그의 인생을 여기까지 끌고 왔다.

“늦게 시켜 먹은 자장면. 비닐도 뜯지 않고 급하게 단무지에 젓가락질하기. 길 가다 한 손에 잡은 핸드폰으로 통화하면서 다른 손으로 호주머니 뒤지며 “내 휴대폰 어디 갔지?”하며 낭패해하던 사오정…. 그런 형이 박창수 열사 만나 노동운동 하기 전엔 청바지에 도끼 빗 꽂고 음악다방 ‘죽돌이’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본지 7월22일자 ‘이정호의 미디어 비평’ 중에서)

84년 군에 입대해 86년 제대하고 돌아온 회사의 풍경은 그 전과는 다른 낯선 것이었다. 누군가 해고됐다고 했다. 박영제·이정식·김진숙이라고 했다. 해고자들은 ‘출근투쟁’이라는 걸 했던 모양이다. 한데 그 모양새가 영 군색했던가 보다.

“우린 저길 들어가야 한다고, 저기 ‘화이바’도 있고 안전화도 있고 작업복도 있고 공구통도 있고 수건도 빨아야 하고 쥐가 안 먹게 비누 뚜껑도 챙겨야 한다고, 들어가게 해 달라고 경비 아저씨들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리는 게, 그때 우리의 출근투쟁이란 거였다.”(김진숙 ‘소금꽃 나무’ 중에서)

해고자들이 저러거나 말거나, 박성호는 관심이 없었다. 회사 비상기획실은 연일 “우리 회사에 빨갱이가 나타났다. 그것도 여자 빨갱이다”고 반공교육을 해 댔다. 박성호도 “저런 이들과 어울리다간 내 신세만 버리지” 여겼다.

그보단 배 타러 나갔다 돌아온 친구들과 어울려 디스코장으로, 당구장으로 몰려다니는 게 좋았다. “어릴 땐 몸도 날렵하고 얼굴도 뽀얘서 공장에서도 얼마나 애 취급을 받았는지…. 그래도 따르는 여자는 좀 있었지예.” 젊었기에 빛이 났던 ‘써니 데이’ 스토리다. 하지만 누군들 피해 갈 수 있었겠는가. 87년의 고고한 바람을….


다시 복직을 기다리며

20년이었다. 86년 해고된 박영제가 복직하는 데 걸린 시간은.

“도시락 이대로 좋은가! 회사와 원양식품의 농간으로 연간 8천만원의 흑자를 내면서도 우리가 먹는 점심밥은 이대로 가도 좋단 말인가? 몇 사람을 위해 수천 명이 계속 개밥을 먹을 것인가! 우리는 선언한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인간이 먹을 수 있는 밥을 위해 개밥을 거부하자! 우리의 단합된 힘을 스스로 과시할 때가 왔다!”(86년 8월30일 ‘도시락 거부운동’ 전단 전문)

당시만 해도 회사에 식당이 없어 직원들에게 도시락이 배급됐다. 새까만 꽁보리밥에 뜨거운 물을 부어 훌훌 마시는 수준이었다. 위생상태도 형편없어 보리밥에 쥐똥이 섞여 나오는 일이 다반사였다. 80년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의 저항운동은 도시락 거부투쟁에서 시작됐다.

며칠 뒤 사장 명의의 대자보가 붙었다. 연말까지 식당을 짓고 상여금 100%를 지급하겠다는 내용이었다. 단결은 승리를 가져왔다. ‘하니까 되더라’는 최초의 경험이다. 거꾸로 이런 생각이 들 만도 하다. 하면 되는 걸, 노동조합은 그동안 왜 손 놓고 있었을까.

노조 집행부의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젊은 노동자들의 노조 대의원 출마가 이어졌다. 새로 뽑힌 젊은 대의원들은 ‘대의원대회를 다녀와서’라는 제목의 유인물을 배포하며 기득권 유지에 급급했던 기존 노조를 정면에서 비판했다. 그 젊은 대의원 중에 박영제·이정식·김진숙이 있었다. 85년 ‘독서회’를 꾸려 전태일 평전을 읽고 노동법 해설서를 공부하던 이들은 이듬해 해고라는 숙명을 공유했다.

“전두환 정권 때 아입니꺼. 민주주의의 ‘민’자도 꺼내기 어려운 시절이었지예. 공장 밖에선 공안기관원들이 따라다니고, 그러다 대공분실에도 잡혀 가고…. 공장 안에선 강제 부서이동에 관리직들의 밀착감시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 대의원대회 유인물 사건이 터졌지요. 상사명령에 불복종하고 회사 명예를 실추했다는 이유로 해고돼 버렸지예.”

해고 20년 만인 2006년 복직한 박영제는 올해 다시 정리해고자 명단에 이름이 올랐다. 복직하려면 또 1년을 기다려야 한다.


87년과 박창수

87년 7월25일. 노동자들은 일손을 놓고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집단행동에 돌입했다. 부산지역 87년 항쟁의 태동을 알린 한진중공업 7·25 투쟁이다. 투쟁은 조직을 남겼다. ‘7·25 동지회’·‘상록회’·‘백두회’로 이어지는 사내노동자 소모임이 활기를 띠었다. 훗날 생긴 현장조직들의 모태다.

사내 소모임을 적극적으로 이끌다 90년 7월27일 조합원 93%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위원장에 당선된 이가 박창수다. 79년 부산기계공고를 졸업해 81년 배관공으로 입사한 박창수는 입사동기인 김진숙 등 3명이 해고된 뒤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7·25 투쟁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노조활동에 눈을 뜬 것 같습니더. 89년 노조 대의원 선거에 나갔다가 떨어지고 나서, 창수 행님하고 나하고 한 50명이 풍물패를 만들었어예. 동아대 가서 풍물을 연습하다가 백두회에도 들어갔고….”

당구장과 디스코장을 전전하던 박성호는 이렇게 노조활동에 발을 들였다. 90년 위원장 선거에서 박창수가 당선된 뒤 박성호는 교선부장으로 노조 상근활동을 시작했다. 입사 동기인 김주익은 문체부장을 맡았다.

당시 한진중공업은 전노협 ‘대기업 특별위원회’ 소속 사업장이었다. 배일도 전 서울지하철노조 위원장이 이때 특위 위원장을 맡았고, 기아기공·대우정밀·세일중공업·현대정공·한진중공업·서울지하철 등이 주축을 이뤘다. 특위는 전노협 미가입 사업장 노조와도 연대를 추진했다. 전노협백서에 따르면 91년 당시 500인 이상 규모 노조는 618곳, 1천인 이상 297곳, 2천인 이상 135곳, 5천인 이상 46곳, 1만인 이상 13곳, 2만인 이상 5곳, 4만인 이상이 1곳이었다.

노태우 정권은 대기업 노조들이 전노협과 가까워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정부는 특위 소속 노조 대표자들이 대우조선 파업에 대한 지원을 논의했다는 이유로 ‘제3자 개입금지’ 혐의를 물어 이들을 구속했다. 그로부터 4개월여 뒤인 91년 5월6일 새벽 박창수 위원장은 경기도 안양병원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고인은 교도관의 눈을 피해 병실로 찾아온 의문의 인물을 따라나섰다가 몇 시간 만에 주검으로 발견됐다. 경찰은 병원에 백골단을 투입해 시신을 탈취한 뒤 강제부검을 실시했다. 경찰이 밝힌 사인은 ‘투신자살’이었다.


"창수 행님 한 풀라고…"

훗날 정권이 바뀌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져 고인의 죽음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뤄졌다. 조사 과정에서 고인과 노조간부들에 대한 전노협 탈퇴공작이 안기부 차원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진 사실이 드러났다.

이 사실을 밝혀낸 이가 바로 박성호다. 고인의 한을 풀어 보겠다고, 2000년 10월 김대중 정부가 만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민간 조사관으로 서울에 올라와 3년을 보냈다.

"처음에는 위원회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지예. 박창수 열사 자료만 분석해서 넘길 생각이었는데. 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래도 국가기관에 들어가는 건데 기본 가락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꺼. 급하게 특별 과외팀이 꾸렸죠. 변호사들이 찍어 주는 내용 중심으로 공부해서 위원회에 들어갔습니다."

박성호는 검찰과 국정원 파견자까지 뒤섞인 위원회에서도 “박 조사관만큼만 조사보고서 꼼꼼하게 작성하라”고 칭찬받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위원회 활동 3년째인 2003년 10월17일 강원도 출장 도중 한걸음에 부산에 내려왔다. 입사 동기 김주익이 죽었다는 것이다.

2002년 시작된 임금 동결과 노동자 650명에 대한 해고는 김주익의 죽음을 예고한 서막이었다. 회사는 단체교섭을 거부하고 노조간부들에게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노조간부들의 급여통장과 집이 가압류됐다. 노조간부에 대한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황에서 김주익은 85호 크레인에 올랐다. 그곳에서 129일을 버틴 뒤 “회사와 계속 싸워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3일 뒤 곽재규씨가 김주익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85호 크레인 근처 4도크에서 투신했다.

“진짜 고독한 사람들은 쉽게 외롭다고 말 못합니다. 조용히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은 쉽게 그 외로움을 투정하지 않습니다. 지금도 어딘가에 계시겠죠? 마치 고공 크레인 위에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 이 세상에 겨우 매달려 있는 듯한 기분으로 지난 하루 버틴 분들.”(2003년 10월22일 <정은임의 영화음악> 오프닝 멘트 중에서)


17년 만에 본 사다리

올해 6월11일 자정을 넘긴 시간 영도조선소. 담장 너머에 수십 개의 사다리가 나타났다. 울타리 저쪽 노동자가 손을 내민다. 괜찮으니 올라오라고. 다섯 차례에 걸친 희망버스 행사 중 유일하게 공장 안에서 진행된 1차 행사의 하이라이트다.

정홍형은 이 광경을 보며 감회에 젖었다. 저 사다리, 17년 만이다. 94년 6월28일 사상 초유의 LNG 선상파업이 벌어졌을 당시에도 사다리가 등장했다. 그해 임단협에서 노조는 일방중재 조항 철폐와 해고노동자 복직, 임금인상, 월급제 실시를 요구했다. 핵심은 일방중재 조항 폐지였다. 이 조항으로 노조의 파업은 매번 불법으로 몰렸고, 파업 때마다 큰 희생이 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는 부산지방노동위원회에 일방중재를 신청했고, 정부개입에 의한 강제 타결을 수용할 수 없었던 노조는 그해 6월27일 쟁의행위 찬반투표 끝에 93.4%의 찬성표를 얻어 파업에 들어갔다. 조합원 1천300여명은 철야농성을 시작했다.

다음날 노조 지도부에 대한 사전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경찰력 투입도 결정됐다. 강제진압이 불가능한 장소가 필요했다. 조합원들은 비상식량과 식수를 챙겨 42미터 높이의 LNG선에 승선했다. 경찰이 치명적 파손을 감수하고 배 안으로 진입할 가능성은 낮았다. 노동자들이 사다리를 타고 배에 오르는 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

85호 크레인 최후의 3인 중 유일한 ‘학출’인 정홍형은 94년 LNG 파업에 깊이 개입한 당사자다(정홍형이 LNG 파업의 주동자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3인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지만, 내밀하게 관여한 것만은 사실이라고 했다).

정홍형은 ‘노무현 라인’으로 빠지지 않은 뚝심의 사나이다. 학생운동을 하다 부산지역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한 이들 중 상당수가 현장을 뒤로 하고 정치를 택했다. 대놓고 변절을 한 것은 아니더라도 돼지저금통 하나쯤 쾌척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LNG 파업으로 노조간부들이 구속됐을 때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날렸던 이가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그 사이 세상은 참 많이도 변했다. 세상만 달라진 게 아니다. 운동도 변하고 있다. 희망버스는 변화의 가능성을 보여 줬다.

“민주노총이 어느새 피가 통하지 않는 조직이 돼 버린 것 같습니더. ‘지침이 내려오지 않으면’, ‘의결단위의 결의가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죽어 가는 조직이 된 것 같아 씁쓸하지예. 물론 희망버스가 보여 준 자발적 참여와 토론의 방식이 조직운동에 곧바로 대입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꺼. 그래도 뭔가 고민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조직노동이 운동과 대중을 붙이는 아교 역할을 해야 하는데 말입니더.”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

변해야 할 것과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확하게 구분하라고, 그것이 운동가의 덕목이라고 이들은 말하고 있다. 크레인 위 물통에 오줌을 받아 놓고 신문지에 똥을 말리며 ‘적들이 공격하면 퍼부어 주리라’ 대비했던 이들의 소박한 방어는 시간에 잊혀지더라도, 동맥경화에 걸린 조직노동을 살려 내자는 간절한 메시지를 누군가는 기억해야 한다.

미처 지면에 다 반영할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투쟁의 엄격함이 몸에 밴 이들이 인터뷰에 소극적(?)이었던 탓도 있지만, 이들이 전해 준 무거운 울림을 지면을 통해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부담이 됐다. 그래서 이 글의 마무리를 이렇게 지으려고 한다. 전망이 안 보인다고, 인물이 없다고 어딘가를 향해 책망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직접 이들을 만나 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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