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범
 

녹색병원·노동환경건강
연구소 산업위생실장

최근 이미경 민주당 의원이 '산재보상보험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개정안은 산업재해 입증책임을 재해자와 근로복지공단이 나눠지도록 했다. 재해자가 원인 물질을 취급했던 사실을 입증했을 때, 근로복지공단이 이것이 거짓이라고 반증하지 못하면 직업병을 인정하도록 한 것이다. 이 개정안에 대해서는 찬성과 반대가 분명히 갈리고 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애매한 경우를 모두 재해로 인정한다면 산재보험 기금이 파산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런 일은 생기지 않는다. 왜 그런지 이제부터 살펴보자.

애매함이란 어느 쪽으로 분류해야 좋을지 잘 모르는 경우를 뜻한다. 일반적으로는 아래 그림 <가>와 같이 애매한 영역이 크지 않을 수 있다. 그런데 직업병 판정과정에서는 <나> 그림과 같이 애매한 중간지점이 상당히 넓은 편이다. <그래프 참조>



 
애매함이 큰 이유는 정보가 부실하기 때문이다. 직업성 암은 최소한 십년 전 작업환경 자료들이 있어야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사업장에서는 그런 자료가 보관되는 경우가 드물다. 설사 작업환경을 측정했더라도 도움이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게 애매한 경우, 지금까지는 산재로 인정받을 수 없었다.

역학조사가 있지 않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을지 모르겠다. 역학조사도 쓸모없을 때가 많다. 이십 년 전 열악했던 작업환경이 사라지고 없는데, 사업장 역학조사를 진행한들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까.

증거를 찾아낼 수 없으면 산재는 불승인된다. 애매할 때 피해를 보는 것은 재해자였다. 하지만 노동자가 사용한 화학물질의 기록을 작성하지 않은 것은 사업주다. 작업환경측정이나 물질안전보건자료와 같은 제도가 부실한 것은 정부에 책임이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잘못으로 재해자가 피해를 봐야한다는 것이 말이 되나. 바로 여기에 답이 있다.

한 번 거꾸로 생각해보자. 정보가 없어 애매할 때 정부나 기업이 불리해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업은 적극적으로 정보를 구축할 것이다. 정부는 제도를 손 봐 애매함을 줄이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애매해서 기업이나 정부가 손해를 본다면 지금보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좀 치사한가? 이런 치사함이야말로 효과적인 규제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에는 알권리를 위한 법이 있다. 이 법에 따라 캘리포니아주가 정한 발암성이나 생식독성 물질을 함유한 모든 제품은 경고표시를 해야 한다. 발암물질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안전한 수준 미만으로 함유됐을 때는 표시를 안 해도 된다. 대신 발암물질이 들어있는 데도 표시를 하지 않거나, 숨긴 사실 등이 들통 나면 소송에 휘말려 막대한 피해를 입는다. 법률이 시행된 후 캘리포니아주는 발암물질과 생식독성물질 목록을 만드는 일을 열심히 했다. 기업은 목록에 있는 물질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더 나아가 기업이 나서 안전기준을 만드는 연구도 지원했다. 기준이 없거나 애매해 기업이 피해를 볼 수 있는 경우를 막아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현재 1년에 약 20명가량이 직업성 암으로 인정된다. 반면 독일이나 프랑스는 1년에 1천명 이상이 직업성 암으로 산재승인을 받고 있다. 이 차이는 발암물질 노출과 관련한 정보를 얼마나 구축됐느냐에 있다. 우리나라는 그 체계만 있을 뿐 제대로 작동이 되지 않고 있다. 근로복지공단에게 입증책임을 주는 것은 녹슨 체계에 기름칠을 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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