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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진보운동, 새로운 순환이 시작되는가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올해 세계 노동자들의 투쟁은 여러모로 남달랐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 발발 이후 별다른 큰 투쟁을 만들지 못했던 노동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기존 조직의 한계를 뛰어넘어 투쟁을 조직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물가·고실업이라는 민생 파탄의 임계점에서 1월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민주화 투쟁이 시작돼 수십년간 계속된 독재정권을 몰아냈고, 스페인에서는 ‘분노한 사람들’이라는 네트워크를 통해 5월15일부터 현재까지 50여개 도시에서 800만명 이상이 참여하는 광장 점거와 집회·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한국에서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문제에 대한 사회적 연대운동으로 희망버스가 조직돼 6월11일부터 11월10일 노사합의안이 마련될 때까지 5차례의 대규모 집회를 포함한 다양한 운동이 진행됐다. 미국에서는 9월17일부터 뉴욕 월스트리트 ‘점거운동’을 계기로 70개 도시에서 금융자본을 규탄하는 점거시위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올 들어 시작된 이들 운동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이용한 자발적 네트워크에 기반하고 있지만 동시에 기존 노동운동과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이집트 민주화운동 과정에서는 친정부 어용노총에 대한 아래로부터의 비판을 무기로 민주노조 건설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돼 한 달 만에 이집트독자노조연맹이 건설됐다. 스페인의 ‘분노한 사람들’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단체들은 정당과 노조에 거리를 두고 있지만 이 운동 역시 지난해 노동법 개악에 맞선 2개 노총의 공동 총파업과 올해 노동절 투쟁에서 영향을 받았다. 광장 점거운동에는 많은 노조 활동가들이 함께 하고 있다. 희망버스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운동 자체가 노조의 정리해고 투쟁에서 촉발됐고, 금속노조가 전면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민주노조 활동가들이 희망버스를 움직이는 핵심 역할을 맡았다. 미국 월가 점거운동 역시 미국 노동운동과의 연대 속에서 확대·발전돼 가고 있으며, 11월2일에 있었던 오클랜드 지역 총파업과 항만 점거 투쟁은 점거시위와 노조운동이 직접적으로 함께 투쟁을 일궈 낸 사례다.

2008년 세계 경제위기를 계기로 시작된 이러한 운동들은 좀 더 길게 보자면 2000년 초반부터 국제적으로 일어난 대안세계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99년 WTO 반대 시애틀 투쟁을 계기로 시작된 대안세계화운동은 세계사회포럼을 거치며 확장됐고 금융세계화, 제국주의 전쟁, 생태, 노동시장 유연화, 주변부 국가들의 민주화 등에 관한 국제적 의제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자본들의 국제회의 시기마다 대규모 투쟁을 조직해 왔다. 대안세계화 운동은 최근 몇 년간 구체적 투쟁을 조직하지 못한 채 다소 침체된 상태에 있었지만, 북아프리카·남유럽·북미 등에서 경제위기 이후 드러난 극단적 부익부 빈익빈 상황이 다시 이 운동을 재활성화시키고 있다. 한 사업장의 정리해고 문제로 촉발됐지만 한국의 희망버스 역시 동일선상에 존재한다. 단적으로 경제위기 이후 가장 큰 정리해고 사태가 벌어진 쌍용차와 한진중공업은 모두 자본의 국제적 이동에 따른 결과였고, 재벌과 초국적기업이 이익은 사유화하며 희생은 전 국민에게 전가하는 작태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희망버스 운동을 성공시킨 배경이었다. 월스트리트의 “1%에 맞선 99%” 구호가 자연스레 희망버스에서도 사용된 이유이기도 하다.

세계적으로 진보운동은 80년대 신자유주의 전면화 이후 계속 축소돼 왔다. 노동시장 유연화와 노조탄압에 노동운동은 규모도, 그 주장의 내용도 후퇴를 거듭했다. 선진국의 제조업 공장들이 한국·브라질·남아공 같은 반주변부 국가들로 이동하며 선진국 노동자들은 고용 불안에 위축돼 양보교섭과 임금삭감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리고 이들 공장들이 들어선 반주변부 국가들의 노동운동은 80년대부터 90년대 초반까지 크게 성장했지만 90년대 후반이 되면 다시 이들 공장이 주변부 국가들로, 무노조 지역으로 이동하며 80년대 선진국 노동자들이 겪어야 했던 것과 비슷한 고용불안·임금 삭감을 겪었다. 90년대 말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제적 연대와 공동행동을 도모하는 대안세계화 운동이 시작됐고, 세계 금융위기를 계기로 올해 이집트·튀니지·스페인·한국·미국에서 자본의 세계화에 저항하는 새로운 운동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 운동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지는 여전히 열린 문제다. 경제위기 시대에 말 그대로 대안세계를 건설할 실체 있는 힘으로 발전할지, 아니면 수많은 이전의 운동들과 비슷하게 그저 문화적 캠페인으로 그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지금 현재의 진보진영 실천이 중요한 이유다. 우리는 지금 세계 진보운동의 새로운 순환점에 서 있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한지원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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