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모 인터넷방송에 나온 ‘섬세하신 그분’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어떤 분을 지칭하는 말인데, 그 단어를 들으면 ‘너무나도 섬세하신’ 다른 한 분의 얼굴이 떠오른다.
갓 법률원에 입사해 사건을 배워 가던 지난해, 한 장의 사진이 내 앞에 놓였다. 양복을 입은 한 사내가 역시 양복을 입은 남자의 멱살을 잡고 있는 사진인데, 배치된 글씨나 그림으로 보아 일반 주간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합성사진을 이용한 잡지표지로 보였다. 그런데 이 사진을 만든 사람이 검찰조사를 받고 있단다.
사정을 들어 보니 이 표지는 2009년에 있었던 전면파업이 정부 및 검찰에 의해 불법파업으로 규정되면서 170여명의 형사 고소, 1만2천명의 대량징계, 96억원의 손해배상청구 등으로 위기에 처해 있던 한 노조의 노보 표지였다. 그런데 사용자인 모 공기업의 사장이 노조 위원장에게 멱살을 잡힌 것으로 표현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심한 모욕감을 느껴 검찰에 노보 편집장을 형법상 모욕죄로 고소했다는 것이다.
‘그’ 노조는 2008년에 단체협약이 만료돼 2008년 말부터 단체협약 갱신을 위한 파업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2009년 5월까지 자체적으로 파업을 유보하고 사측의 전향적 태도를 기다렸다. 그 사이 사측에 충분한 교섭기회를 줬고, 2009년 말 파업 당시에도 중앙노동위원회 조정신청, 쟁의행위 찬반투표, 2차례의 단시간 경고파업, 필수유지인력 배치 등으로 절차를 준수했다. 때문에 정부도 처음에는 불법파업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파업 시작 며칠 후 대통령이 파업에 대해 적당히 타협하면 안 된다며 엄정한 대응을 당부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정부부처와 검찰이 일사분란하게 위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보수언론도 파업에 따른 국민 불편을 강조하는 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러한 압력에 파업 시작 열흘도 되지 않아 노조는 아무런 조건 없이 파업을 철회하고 전원 복귀하게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의 사용자인 공기업은 ‘공공기관 선진화’를 방해했다는 명분으로 파업에 참가한 1만2천명의 조합원에 대해 중징계 절차를 단행한 것이다.
노보 편집장 역시 이 파업으로 인해 업무방해죄로 형사기소되고, 회사로부터 징계해임된 상황이었다. 본인과 동료들이 삶의 터전을 잃은 막막한 상황에 처하자 노조의 소식지에 이를 비판하는 사진과 기사를 실었다. 그에게는 마지막 남은 항의수단이었을 터였다.
이 건은 결국 재판으로 이어졌다. “노조 소식지를 통한 표현활동은 헌법상 단결권과 표현의 자유에 의해 이중으로 강한 보호를 받으며, 노사 간 힘의 차이를 대등하게 극복하려는 수단으로써 헌법이 보장하는 단결권의 범위 안에 포함되므로 공인인 공기업 사장이 수인해야 할 범위 안에 포함돼 사진 게재가 위법하지 않다”는 것이 변론의 취지였다.
그러나 법원은 사진 게재로 공기업 사장이 모욕을 당한 점이 인정되고, 노조 소식지를 통한 표현활동은 단체교섭·쟁의행위와 같은 노조 활동에 해당되지 않아 사회상규상 허용되는 행위라고 볼 수 없다며 유죄라고 판단했다. 그나마 편집장이 파업 이전에는 교통위반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청년이었기에 선고유예를 받았다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누군가가 자신의 멱살을 잡는 사진 한 장에 상처를 받았던 섬세한 감성의 그 분은 본인의 결정으로 1만2천명이라는 많은 사람의 삶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는, 노동탄압에 사진 한 장으로 항의할 수밖에 없었던 한 청년이 피고인으로 법정에 선 것을 보고는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가을의 끝에서 오직 자신만을 향한 그분의 섬세한 마음이 다시금 떠오른다. 그분의 섬세한 마음을 이 글에서는 충분히 배려했으니, 혹시 이 글을 읽으시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길….
그분의 섬세함
- 기자명 오세정
- 입력 2011.11.1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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