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마운 사람들과 함께 섰다. 배우 김여진씨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전했다. 아이를 가져 자주 찾지 못했다는 김여진씨는 내내 울었다.


전기 랜턴을 손에 들고 직각으로 떨어지는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35미터 높이 골리앗 크레인 85호기 조종실을 비우고, 청소를 하고, 짐을 싸고, 손을 씻고,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며 누굴 떠올렸을까. 김진숙이 살아서 돌아왔다.


309일 만의 귀환

10일 오후 3시17분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안. 하얀색 야구모자를 거꾸로 쓴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이 크레인 중턱에서 지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아래 모여 있던 한진중 노동자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309일 만의 재회다.

크레인 농성을 견딘 김진숙은 좋든 싫든 정리해고 투쟁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올해 1월6일, 정리해고 교섭이 답보 상태에 빠지고 해고가 눈앞에 닥쳤을 때 그는 홀로 크레인 위에 올랐다. 김주익 전 한진중지회장이 죽어서 내려온 바로 그 크레인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김 지도위원의 고공농성은 우리 사회에 크나큰 충격을 던졌다.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의 여파로 노동자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도 시큰둥하던 사람들이 한진중의 정리해고 문제에는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트위터는 유력한 도구로 활용됐다. 김 지도위원은 트위터를 이용해 한진중의 소식을 실시간으로 알렸다. 이는 다시 ‘희망의 버스’라는 진일보한 대중투쟁을 탄생시켰다. 조직된 노동운동이 해내지 못한 대중 동원을 김진숙이 해냈다. ‘블록버스터급 영웅’의 등장이라는 비유까지 등장했다. 죽을 각오를 해야만 비로소 답이 보이는 우리 사회 노사관계의 실상을 반어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살아 내려올 줄 알았다"

 

▲ 아이를 안았고 빵을 물렸다. 아이가 웃었고 아빠도 웃었다. 해고자 아빠는 이제 복직을 기다린다.

같은 시각 영도조선소 본관 앞. 김 지도위원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는 기자들이 어깨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 틈바구니로 눈가가 벌게진 정리해고자 가족들이 “기자도 정치인도 다 비키라. 언제적부터 우리한테 그렇게 관심이 많았다고 가족들보다 앞에 섰노”라며 서러움을 토해낸다.

그러기를 30여분. 꽃목걸이를 두른 김 지도위원과 3명의 농성자가 두 팔을 번쩍 든 채 모습을 드러냈다. 류마티스 관절염이 왔다는 그 팔을 힘껏 흔들었다.

“저는 제가 살아 내려올 줄 알았습니다. 여러분을 믿었고, 동지들을 믿었습니다. 여러분이 저희를 살리셨습니다.”

눈물범벅의 한 여인이 김 지도위원의 품을 파고든다. 영화배우 김여진이다.

“몇 번이나 오늘을 꿈꿨는지 몰라요. 1차 희망버스 행사에 다녀온 뒤 아기를 가져서 2차 때부턴 오지 못했어요. 어찌나 애가 닳던지. 너무 고맙습니다. 그 말밖에는 더 할 말이 없어요.”

지난 1월6일부터 이날까지 농성이 진행되는 내내 김 지도위원의 손발이 돼 준 황이랑씨도 입을 연다. 먹을거리와 생필품을 조달해야 했던 그는 명절 때도 아버지 기일에도 김 지도위원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1월6일이 현실 같고 지금이 비현실 같은 이상한 시간을 보내왔어요. 너무 많이 기다려 온 순간이라 실감이 나지 않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이날 만남은 짧았다. 15분여간 진행된 기자회견이 끝났다. 다시 헤어질 시간이다. 연예인 입국장면을 방불케 하는 진풍경이 연출됐다. 체포영장을 집행하겠다는 경찰과 이를 막으려는 노동자들 사이에 몸싸움도 벌어졌다.

아수라장 속에서 응급차에 오른 네 명의 노동자는 박수를 받으며 떠났다. 남겨진 사람들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입만 열면“고맙다”고 말했다.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벅찬 감동을 주는지 살아 돌아온 네 명의 노동자가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 가족대책위 회원들이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
▲ 김진숙 지도위원이 농성을 도와준 이와 인사한 뒤 눈물을 닦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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