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언제부터였을까. 노동자가 노동자 아닌 자를 우리라고 부른 것이. 무엇 때문이었을까. 노동자가 아닌 자를 노동자의 우리가 된 것이. 진보·민중·민주·민족…. 노동이 아닌 범주들이 노동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서 질주하고 있다. 하나같이 노동자가 아닌 자도 우리라고 하는 범주들이다.

서울시장 선거에서 ‘우리’가 승리했다. 시장 후보가 나오고서 박원순은 ‘우리’의 후보가 돼서 ‘우리’와 함께 선거운동을 해서 마침내 박원순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됐다. 이번뿐만 아니다. 지금까지 줄곧 그래왔다. 이 나라에서 운동은 이런 것이었다. 하나의 사안이 발생하면 우리로서 그것에 달라붙어 투쟁해왔다. 사안은 달라져도 투쟁의 주체는 언제나 우리였다. 그러니 사안에 따라 어디까지 우리여야 하느냐로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투쟁을 주도하는 단체의 조직도 무슨 대책위원회의 이름 변경으로 족했다. 그리고 노동자의 이름은 ‘우리’의 이름에 가려졌다. 사실 진보·민중·민주·민족처럼 노동이 아닌 범주들 앞에선 노동자의 이름은 초라했다. 그 범주들 앞에서 노동자를 말한다는 건 이 나라 인민과 민족의 대의를 저버리는 것일 수 있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노동자도 우리여야 했다. 노동자는 우리의 승리에 환호하고 우리의 패배에 낙담해야 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박원순과 함께 우리는 승리했다.



2. 이런 세상에선 노동이 없어도 진보를 말할 수 있다. 노동이 아니어도 민주를 말할 수 있다. 노동자 권리보다 이들 범주가 내세우는 가치가 우선한다. 이들 범주가 내세우는 가치가 우월하다. 애초 이들 범주는 노동에 앞서 먼저 극복해야 할 것들로 내세워진 것이다. 애초 노동보다 앞서는 가치라고 해서 내세워진 것이다. 애초 이들 범주 자체가 그렇게 해서 파악된 개념이었다. 그것은 노동자만이 아니라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를 내세워 그 과제극복에 우리를 몰아넣고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든지 붙잡고 물어보라. 진보·민중·민주·민족과 노동 중 어떤 말이 당신의 심장을 뛰게 하는 가하고. 그렇다. 당신의 심장은, 우리의 심장은 이들 범주로 뛰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는 노동이 아닌 진보·민중·민주·민족 등으로 질주해 왔던 것이다. 편협하지 않은 우리 세상의 고상한 가치가 이들 범주에 담겨 있다. 이에 대해 노동은 편협하고 편파적인 우리 세상의 누추한 삶의 범주다. 그러니 순수한 열정으로 뛰어야 할 당신과 우리의 심장은 노동으로는 이 세상에서 뛰지 않는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노동은 진보·민중·민주·민족에 밀려나 있었다. 이건 우리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인 그들조차도 그렇다. 이 세상의 범주들은 이렇게 노동이 없어도 진보·민중·민주·민족을 말할 수 있도록 구축됐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누구나, 한나라당 아무개 의원조차도 이들 범주를 외치며 ‘위하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니 이들 범주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그 자가 누구의 편인지 구분할 수가 없는 세상이다.



3. 그래서 노동자가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다며 왜 노동을 말하지 않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말한다. 그래야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래야 통 크게 우리가 돼서 압도적인 수적 우위로 투쟁을 승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노동이 아닌 굳이 진보·민중·민주·민족을 외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건 노동자를 위한 것이라고, 그러니 노동자는 이것을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외쳐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 노동자가 수적으로 열세거나 아직 사회생산의 주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못한 상태에서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로 끌어 모아 편먹기로 기술을 발휘해서 종국에는 노동자가 주인이 되기 위한 범주라면 노동의 이해에 따른 것이니 노동운동의 전략의 문제일 것이다. 실제로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아직 다수가 아니었을 때 사회의 주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못했을 때에도 노동자가 원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펼 수 있었다. 그래서 온갖 계급관계를 분석하고 이를 위해 사회구성체가 어떻다고 이것이 어디까지 우리편으로 할 수 있는지 판단의 기준이라고 논쟁했었다. 어디까지가 피지배자, 즉 민중으로 파악해야 하느냐 하는 논쟁으로 노동운동은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운동은 그런 것이었다. 이 세상의 모순을 지양할 우리를 찾고 우리를 하나로 묶어 세워 그것을 위한 투쟁에 나서도록 하는 것. 그러니 무엇보다도 ‘우리’가 중요했다. 그런데 지금도 그래야 하는 것일까. 아직도 ‘우리’를 찾아 헤매야 하는 것일까. 노동자는. 지금 노동자는 이 세상에서 압도적인 다수가 됐다. 이제 노동자는 이 세상의 생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도 노동자는 노동이 아닌 진보·민중·민주·민족을 외치고 있다. 노동운동은 여전히 노동보다 진보·민중·민주·민족이 우선하는 가치로서 전개되고 있다. 너무도 철저하게 노동운동에 자리 잡고 있어서 이제 감히 누구도 진보·민중·민주·민족이 아닌 노동을 외쳐야 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기껏해야 노동이 없는 무엇은 무엇이 아니라고 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4. 그러나 이미 수적으로 압도적이고 생산의 주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도 계속 이들 범주를 내세우고 있다면 그것이 노동의 이해에 따른 것인지 돌아봐야 한다. 노동자는 이제 압도적이고 주된 부분이다. 그러니 노동자는 충분히 이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가지고 있다. 이제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이해를 대변해서 노동자의 요구를 외치는 것으로 충분히 노동자가 원하는 세상을 가져올 수가 있다. 오히려 문제는 너무도 많은 노동자를 노동운동에 하나로 묶어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로서 노동자 말고도 보다 많은 사람들을 한편으로 묶지 못해서가 아니라 노동자조차도 한편으로 묶지 못해서가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도 노동운동은 여전히 우리가 누구인지를 고민하고 우리로서 외치고 투쟁하고 있다. 우리로 묶는 이들 범주로 노동자를 끌어들이기 위해선 노동의 범주는 이들 범주의 수준으로 낮추거나 노동의 범주를 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노동자 대오의 분열을 가져온다. 그리고 이들 범주는 노동자 권리로부터 멀어진 추상의 범주이기 때문에 노동자는 추상수준의 논란으로 명확하게 그것을 자신의 이해로 하지 못한다. 그러다 흩어지고 노동자는 하나의 대오가 되지 못하고 급기야 노동운동의 길조차 잃고서 헤매게 된다. 바로 지금 이 나라 노동운동이다. 그래서 박원순의 구호를 노동자는 따라서 외쳐야 했다. 그리고 이제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우리의 승리를 위해서 야권의 연대와 통합을 향해서 질주하고 있다. 그러면서 말하고 있다. 우리가 돼서 승리했다고. 서울시장 선거를 보라고. 하나로 뭉치면 승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이 나라 노동자에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우리의 승리를 위해서 노동자는 우리로서 외쳐야만 했다. 노동자는 자신의 요구로 투쟁하지 못했다. 노동자의 승리가 왜 우리의 승리와 다른 것인지 노동운동은 노동자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저 우리로서 투쟁하니 승리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그 구호는 노동자의 구호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그 구호가 노동자의 구호가 아니어서, 노동자의 권리 확보를 위한 것이 아니라서 노동자 아닌 사용자조차도 우리로서 하나로 했던 것이었다. 이것은 무엇인가. 자본과 함께 하는 외치는 노동자의 구호는 노동자권리를 위한 것일 수 없는데 이걸 외쳐야 우리 승리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그럴 것이다. 노동자의 권리 없는 승리가 그게 노동운동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면. 그러나 그것은 노동운동의 승리일 수는 없다. 노동자의 권리 확보를 위한 한 걸음일 수 있으려면 그 승리로 어떤 노동자의 권리가 확보되는 것인지 노동자에게 말해야 한다. 만약 노동운동이 노동자의 권리 확보를 말하지 않고서 우리의 승리라고 한다면 이에 대해 노동자는 물을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이 무엇이냐고. 이에 노동자가 소수이고 생산의 주된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못했을 때는 아직은 아니라고, 지금은 우리로서 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해도 됐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더 이상 이 나라 노동자에게 아직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이미 세상은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그것을 위해 노동자를 묶어서 투쟁할 때이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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