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덕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1. 지금 이 나라 노조운동은 산별노조로 가고 있다. 이미 금속·금융·보건·공공운수·언론·건설 등 노동자는 산별노조 조합원이고, 사무금융 등 노동자도 산별 추진 중이다. 이 산별노조가 새로이 본격 출범한 지도 10여년이다. 이제 산별은 새로운 이름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나간 구호도 아니다. 지금 산별노조는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가슴을 붉게 타오르게 하는 희망의 태양이 아니다. 그렇다고 기운을 잃고 떨어지는 저 붉은 단풍잎도 아니다. 이 나라 노동운동에서 산별노조운동은 이렇게 자리하고 있다. 열광을 잃고서 열정도 없이 냉정으로.

2. 얼마 전 금속노조 박상철 집행부의 임기가 시작됐다. 2001년 2월 금속노조가 출범하고 나서 벌써 7기 집행부고, 10년이다. 2006년 말 대공장노조가 산별전환하고 15만명의 통합금속노조로 출범하고서도 정갑득·박유기 집행부에 이어 3기째고 5년이다. 산별노조로 전환을 추진하면서 조합원에게 이렇게 선전했다. 이 나라 노동운동에 새로운 전환을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교육했다.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넘어서야만 한다. 그리하여 산별노조 출범선언문으로 이렇게 낭독했다.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 이 나라 노동운동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게 산별노조다. 10년 전 중소사업장에서도, 5년 전 대공장에서도 이렇게 교육하고 선전하고서 금속노조의 지회·지부로 전환하고 산별을 선언할 수 있었다. 이 나라 산별노조들은 이렇게 출범했다. 그리고서 5년, 10년이 지났다. 그런데 이제 이 나라 노동운동의 새로운 전환을 가져올 수 있다고 노동자는 기대하지 않는다. 산별노조가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을 세울 수 있다고 누구도 감히 말하지 않는다. 그 동안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뚜렷이 내세울 것도 없다. 현대자동차노조가 조합원에게는 확보해줄 수 없었던 권리를 금속노조, 산별노조라서 확보해준 권리라고 내세울 게 없다. 이렇게 지난 10년 이 나라 노조운동의 빛나던 전망이 빛을 잃었다. 도대체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을까.

3. 자본과 권력의 탓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이 자본의 세상에서 자본이 노조운동을 탄압하지 않고 협력하고 지원할 것이라고 인식했다는 게 잘못이다. 우리의 세상은 철저히 이해가 대립되는 주체 사이의 관계로 세워졌다. 1원을 주면 1원어치를 받는 이해타산의 세상, 그게 질서인 세상으로 기초공사돼서 계속 쌓아올려져 왔다. 인정도 없고 사정도 없는 계약의 세상, 이게 이 세상의 법질서다. 이런 세상에서 노동자는 사용자에게 근로를 제공하고 사용자는 그에 대해 임금을 지급하는 계약관계가 이 노동과 자본의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자본은 노동을 억눌러 노동자가 사용자를 상대로 한 권리 주장을 제대로 못하도록 하고, 무엇보다도 노동자의 권리 확보는 사용자의 몫을 빼앗기는 것이므로, 이걸 저지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게 당연하다. 그리고 그 질서를 집행하는 게 권력이다. 그러니 지금 이 나라에서 산별노조가 조합원의 권리 확보를 못하는 게 자본과 권력의 탄압 때문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자본과 권력의 탓이 아니라면? 산별노조 자체에서 답을 찾을 수밖에 없다. 이 나라에서 산별노조가 무엇을 해왔던가. 무엇을 최우선으로 사업과 투쟁을 해왔던가. 이걸 살펴보고 거기서 답을 찾아야 한다. 출범 이후 어떠한 기업별노조보다 많은 조합원·조합비 등 예산을 갖고서 이 나라 산별노조가 해왔던 것은 산별교섭구조 확립이었다. 산별 통일(중앙)교섭이 산별노조의 목표였고 여기에 사업을 집중했다. 그러나 교섭방식은 노조의 희망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교섭은 노조와 사용자 사이의 협상의 장이다. 사용자가 교섭을 거부하거나 해태할 수는 없으나 그건 노조와 개별 사용자 사이의 교섭에만 해당할 뿐이다. 산별노조와 산별사용자단체 사이의 통일교섭 등 산별교섭구조는 사용자가 원하지 않으면, 달리 말하면 협력해 주지 않으면 제대로 된 교섭구조로 기능할 수가 없다. 그런데 산별노조는 이를 주된 사업으로 추진하고 임금 등 단체협약 체결과 연동해서 투쟁으로 사용자를 압박했다. 그래서 사용자에게 중앙교섭에 참가하고 사용자단체에 가입하도록 했다. 교섭구조의 확립에 거대해진 산별노조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몰아넣었다. 그 결과 보건·금융·금속 등에서 사용자단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산별교섭이 진행돼서 중앙교섭합의서 등 산별협약이 체결됐다.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것이지. 노동자가 주인되는 세상에 어떻게 다가갔다는 것이고, 이 나라 노동운동에서 어떠한 새로운 전환을 가져온 것일까. 기업별노조의 한계를 어떻게 넘어섰다는 것일까.

이 질문들에 답하는 것은 간단하다. 산별협약을 들여다보면 된다. 지금까지 기업별노조가 체결해왔던 단체협약을 월등히 상회하는 조합원의 권리를 확보하지 못했다. 단체교섭은 단체협약으로 조합원의 권리를 확보하기 위한 것인데 산별노조가 출범 이후 지금까지 교섭구조에 그토록 집중해 왔음에도 산별협약은 사업장협약보다 더 나아간 것을 찾기 어렵다. 이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산별노조가 출범해서 지금까지 산별교섭구조 확립에 힘을 집중해왔음에도 조합원의 권리는 기업별노조의 협약보다 나아가지 못했으니 산별노조의 이 사업방향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바로 산별교섭구조의 확립이라는 산별노조의 사업방향이 문제였다. 산별 통일교섭 등 산별교섭구조의 확립은 노조가 일방적으로 요구해서 쟁취될 수 없다. 사용자가 협력해줘야 마련될 수 있는 것이다. 산별교섭 참가는 사용자가 원하지 않으면 강제할 수 없다. 산별 사용자단체는 사용자가 스스로 회원으로 가입해야 한다. 설사 노사합의로 산별교섭에 참가하기로 하고 사용자단체에 가입하기로 했다고 해도 이는 사용자의 행위로만 가능하다. 설사 참가하고 가입했다고 해도 사용자가 언제든지 탈퇴해버리면 그토록 힘겹게 쟁취한 산별교섭구조는 허무하게 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산별교섭법제화를 주장하고 있지만 이것도 사용자의 참가를 전제로 하는 단체교섭의 성질상 산별노조가 바라는 내용대로 법제화되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이 나라에서 금속노조 등 산별노조는 산별교섭구조 확립을 위해서 사용자가 크게 부담을 가질 수준의 요구를 산별교섭에서 하지 않았다. 요구했다고 해도 사용자가 겁을 집어먹고 참가하지 않겠다고 하면 그 수준을 낮추어 산별교섭 참가를 전제로 산별협약을 체결했다. 그러니 이 나라에서 산별협약은 기존 기업별협약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고 특히 조합원의 권리 확보에서는 더욱 그렇다. 다만 산별노조의 활동과 교섭에 관해 몇 개의 규정을 두고 있는 게 다르다. 그리고 사용자에 맞선 조합원의 권리 확보는 사업장에 맡겨놓았다. 결국 지난 10여년간 산별노조는 산별교섭구조 확립에 집중하느라 조합원 권리는 사업장에 방치했던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산별교섭 쟁취가 조합원 권리 확보를 대체해 버렸다. 노조는 조합원의 권리 확보를 위해 단체교섭하고 이걸 쟁취하기 위해 쟁의행위해서 조합원의 권리문서인 단체협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노조가 이걸 하지 않으니 조합원은 산별노조에 무관심하다. 조합원에게는 산별노조는 자신의 권리와 무관한 요구를 하는, 자신과는 너무 높은 수준의 조합 활동을 하는 곳이었다. 그 산별노조의 당위를 주장하면서 산별교섭구조를 확립해야 한다고 교육하는 산별노조간부는 너무 높이 서 있었다.

4. 단순히 조합원의 권리 확보만 산별교섭구조에 바쳐진 게 아니었다. 이 나라 노동운동의 희망까지도 지난 10년 산별교섭 쟁취의 구호에서 사그라져 왔다. 산별노조에서 조합원의 권리 확보를 위한 선진적인 요구를 찾아볼 수 없었다. 기존 기업별노조가 쟁취해주지 못한 조합원의 권리를 산별노조의 조직력과 투쟁력으로 쟁취하기 위해 집중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렇게 됐다. 이 나라 노동운동은 기존에 확보된 권리를 지키는데 급급해 허둥대느라 바쁘다. 노동자 중 조직된 부분, 선진적인 부분이 이러니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권리는 날로 약화돼온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신자유주의니 뭐니 하며 자본과 권력의 탓을 해댄다. 80년대 민주노조운동이, 87년 노동자대투쟁이 자본과 권력의 탄압이 지금보다 약해서, 신자유주의가 아니라서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투쟁했던 것이 아니다. 그때도 조직된 노동자는 선진적인 노동자의 권리를 제기해서 투쟁함으로써 이 나라 노동운동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던 것이다. 결코 노동자의 권리 요구 수준을 낮춤으로써 노조가 사용자와의 교섭의 장을 만들 수 있다고 착각하지 않았다. 오늘 이 나라 노동운동이 지리멸렬이라면 그건 자본과 권력의 탄압 때문이 결코 아니다. 그건 노동운동의 조직적 대오인 금속노조 등 산별노조가 사업과 투쟁의 방향을 잘못 잡고 있기 때문이다. 산별노조의 주된 사업과 투쟁이었던 산별교섭 쟁취라는 구호가 조합원과 이 나라 노동자의 권리를 위한 투쟁의 구호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조합원에게 투쟁을 말하려면 쟁취할 권리가 무엇인지를 말해줘야 한다. 노동자에게 노조운동을 말하려면 노조는 노동자에게 줄 권리가 무엇인지 말해줘야 한다. 분노하라, 투쟁하라. 이렇게 말하려면 노조운동은 조합원에게 노동자에게 확보할 권리를 말해줘야 한다. 그럴 때 이 나라 산별노조는 떨어지는 단풍잎이 아니라 희망의 태양일 수 있다. 붉다고 다 희망이 아니다.

노동법률원 법률사무소 새날 대표 (h7420t@yaho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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