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20.9.29 화 08:00
상단여백
HOME 칼럼 노노모의 노동에세이
‘합의’가 노동자 권리구제인가박윤진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삶 )
박윤진

공인노무사
(노무법인 삶 )

책상 위에 메모 하나가 놓여 있다. “○○○님. 12시 전 방문상담. 010-***-****” 전화를 걸어 보니 지난 8월 해고상담 과정에서 국선 노무사제도를 안내해 줬던 분이다. 그 뒤 그는 회사로부터 원직복직 명령을 받았다며 감사전화를 줬었다. 무슨 일이 난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회사의 복직명령은 취소됐다. 구제신청을 하자마자 원직복직 명령을 내렸던 회사는 다시 이틀 뒤 문자로 해고수당을 줄 테니 나오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그는 병원 야간당직 업무를 하다 위법한 업무지시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구두로 해고됐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에 배어 나왔다.

구제신청한 지 한 달이 넘었는데 회사의 답변서는 한 차례도 오지 않았고 국선 노무사도, 담당 조사관도 사건을 진행시키지 않는 눈치였다. 담당 국선 노무사와 통화를 했느냐고 묻자 불만을 쏟아낸다. 사건 진행상황을 물으려고 전화를 걸면 짜증난 말투로 합의 얘기만 한다고…. 도대체 부당해고는 인정이 될 수 있겠느냐며 답답해하신다. 다행히 사건 취하는 하지 않고 있었다.

이분 외에도 비슷한 전화를 두어 번 받은 적이 있다. 초심에서 부당해고 구제신청이 기각됐는데 판정문이 나왔는지, 재심신청을 해야 할지 상의하러 담당 국선 노무사에게 전화를 했다가 싸늘하게 거절을 당했던 분도 있다. 그분은 ‘나는 이제 담당이 아니니 모르겠다’는 국선 노무사의 얘기를 듣고는 답답한 마음에 사무실에 들렀다고 했다.

동종업계 종사자로서 아쉬운 감은 있지만 이미 끝난 사건에 대한 친절한 상담을 못할 만큼 바쁘거나 여유가 없었을 수도 있으니 그쪽만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분은 “(국선 노무사가) 제출한 이유서를 본 적도 없고 진행 과정 내내 합의하실거냐는 전화만 몇 차례 받았지 해고와 관련한 질문은 거의 없었다”며 “심문회의 때는 (국선 노무사가) 한마디도 안 했다”고 불만을 쏟아냈다. 그는 내게 국선노무사를 해 줄 수 없냐고 묻기까지 했다.

최근에는 급기야 국선 노무사를 해임하고 사건을 내게 맡긴 분까지 생겼다. 국선 노무사를 해임하고 비용을 들여 노무사를 선임하게 된 배경은 비슷했다. 사건을 제대로 진행하려 하지 않고 합의를 할거니, 말거니 하는 의사만 확인한다는 것이다. 그는 국선 노무사가 하는 얘기나 조사관이 하는 말이나 어쩌면 그렇게 똑같으냐고 말했다.

국선 노무사제도는 취약계층의 노동관계법상 권리를 구제해 주기 위해 2008년 2월 말부터 시행되고 있는 공적지원제도다. 월 평균임금이 170만원 미만인 경우 원하면 대리인 선임을 신청할 수 있다. 현재 국선 노무사는 전국적으로 350여명이 위촉돼 활동하고 있다. 서울지역의 경우 두 달에 한 번꼴로 사건을 배정받아 진행한다. 비용은 서면 제출·심문회의 참석 등에 따라 차등지급되는데 1건당 20만~40만원 선이다. 사건결과와 무관하게 보장하고 이는 사건결과와 무관하게 지급되고 별도의 인센티브는 없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실제 국선 노무사제도는 사건의 사실관계를 밝혀 권리를 구제하기보다 당사자 간 합의를 이끄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노동위원회 사건에서 합의는 조사관 내지는 공익위원들로부터 늘 권고받는 일이지만 국선 노무사제도를 이용하는 노동자에게는 마치 그것이 당연한 일처럼 권고받게 된다. 담당 조사관은 물론 담당 국선 노무사에 의해 합의가 강력하게 진행되기 때문이다. 특히 원직복직을 원하는 노동자에게도 ‘어차피 돌아가야 일하기 힘든 거 아니냐’, ‘이 정도 사건은 합의해야 한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두어 장짜리 이유서를 쓰고 합의금액부터 따져 묻는 터라 여기에 상처받는 노동자들도 많다.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제도를 마다하고 비용을 들여 노무사를 따로 선임하는 경우도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결국 공익 차원에서 제공하는 무료법률서비스와 행정서비스를 제 처지에서 간편한 일만 우선 처리하는 일부 조사관과 노무사들에게 일정한 제재가 필요한 때가 됐음을 뜻하는 것 아닐까. 현재 국선 노무사를 선임하는 권한을 갖고 있는 노무사회의 제1의 선정기준은 회비완납이다. 그리고 연속 선임된 노무사를 배제하고, 동일법인인 경우 인원수를 고려하고, 노무사회의 추천점수와 동순위인 경우 후배기수를 우선한다는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마저 기준 없는 선임에 반발한 일부 회원의 항의에 따라 올해부터 적용했다. 그 어디에도 활동평가 내지는 국선 노무사제도의 취지가 반영된 기준은 없다.

최근 노동부가 체당금 지원사업에 국선 노무사제도를 적용하면서 대상규모와 논의과정 문제 등으로 노무사회 집행부가 총사퇴하는 일도 있었다. 무릇 소속된 회원들의 권익을 위해 복무하는 조직이라고는 하지만 ‘공익적 차원’에서 노동인권을 위해 자신의 직업을 활용해 살고자 하는 노무사의 사명감까지 막아서는 안 될 일이다. 합의만이 노동자 권리구제는 아니지 않은가. 큰 사건 작은 사건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제 소임을 다하는 노무사도 많다. 그런 노무사들의 노력이 빛바래지지 않도록 제도를 보완하고 확대하는 것은 노무사회의 역할이기도 하다. 회원 노무사들의 밥벌이만 지켜 주는 게 전부가 아니다.

박윤진  labortoday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윤진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