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인노무사
(민주노총
서울본부
노동법률지원센터)

1. 오래된 습관, 관성의 과잉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한번 몸에 밴 습관을 바꿔내기란 참 어려운 일이다. 박정희 정권하에서의 산업별노조 체계라는 것도 형식일 뿐이었지만 전두환 정권은 쿠데타 직후 아예 기업별로만 노조를 만들 수 있도록 노조법을 개정해버렸다. 그렇게 강제돼 수십년 세월이 흘렀으니 많은 이들의 골수에 박혀있는 기업별노조 의식을 어찌 쉽게 바꿔낼 수 있을까. 오랜 역사 속에서 불가피 형성돼버린 복잡한 이해관계라는 문제까지 얽혀있으니 더욱 어려운 일이다. 민주노총 조합원의 약 75%가 산업별노조 조합원이라는 오늘 이 시점에도, 이미 상식의 지위를 획득해버린 기업별노조 마인드와 현실은 마치 바퀴벌레처럼 여전히 그 생명력이 끈질기다. 참으로 오래된 습관이요, 그 결과 넘쳐나는 관성의 과잉이다.

노동조합이란 그 역사를 보더라도 원래 기업 밖에 존재하는 것이다. 개별 사업장 내 고용된 노동자들만의 처우개선이나 복리증진이 아니라 같은 직종 및 나아가 동일 산업 내 전체 노동자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 향상이 노동조합의 존재의의이고 또 그런 형식이어야만 제대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 아무리 노사가 대등하다고 말로는 주장해본들 사용종속관계 하에 있는 개별 기업 내 노와 사의 관계가 대등할리 만무하니, 외국에서는 기업별노조(company union)를 어용노조(yellow union)로 거의 등치시켜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산업별노조 건설 운동의 본격화를 통해 이미 많은 수의 산업별노조가 설립됐지만 그 실체를 들여다보면 무늬만 산업별노조인 경우가 많다. 오랜 기업별노조의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이해관계는 일단 차치하더라도 최소한 기본 인식만큼은 분명히 공유할 필요가 있다. 산업별노조란 말 그대로 동일 산업 내 개별 노동자들이 각자 가입해 구성한 조직이며 여기에 혹 있을 수 있는(없어도 된다.) 기업별지부·지회란 단지 그 산업별노조에 가입한 개별 노동자들 중 그저 같은 기업 소속인 자들을 편의상 구분해놓은 노조의 단순 내부기구일 뿐인 것으로 이해해야 함이 원칙이다.

 


2. 산업별노조의 지회는 노동조합이 아니다


대상판결은 산업별노조의 기업별지회가 조합원 총회를 통해 기업별노조로 조직형태변경 결의를 한 것에 대한 효력여부를 다툰 사건이다. 전체적인 노동운동의 위기와 산별노조운동의 일정한 정체기 속에서 노사갈등 및 노사갈등의 또 다른 외피라 할 수 있는 노노갈등의 결과 다시 기업별노조로 전환되는 사례들이 다수 발생하고 있다.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금속노조 ○○지회의 일부 조합원들은 지회 임원 불신임 건 등을 안건으로 지회 총회 소집을 지회장과 지역지부장에게 요구하고 한편으로는 행정관청(대구지방노동청 포항지청장)에 총회 소집권자 지명요청을 했다. 이런저런 사정 속에 결과적으로는 둘 다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황에서 이들은 2010년 5월19일 스스로 조합원총회(1차 총회)를 개최해 지회를 기업별노조로 전환하고 노조 임원 선출 및 규약 제정을 했다. 1차 총회에 대한 효력여부에 다툼이 발생하자 이들은 다시 행정관청에 총회 소집권자 지명을 요구했고, 결국 행청관청은 노동위원회(경북지방노동위원회)의 의결을 얻어 총회 소집권자를 지명했다. 2010년 6월4일 다시 조합원총회(2차 총회)가 개최돼 1차 총회와 동일한 결의를 했다. 이에 따라 이들은 6월7일 기업별노조 설립신고를 했고 행정관청(경주시장)은 이를 수리했다.

두 차례 조합원총회의 의결에 대해 서울중앙지법은 “조직변경에 관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16조는 조직변경의 주체가 ‘노동조합’임을 전제로 하는 규정”이고 “초기업적인 산업별·직종별·지역별 단위노동조합의 지부 또는 지회는 독자적인 규약 및 집행기관을 가지고 독립한 단체로서 활동을 하면서 그 조직이나 조합원에 고유한 사항에 대해서는 독자적인 단체교섭 및 단체협약체결 능력을 가지고 있어 독립된 노동조합으로 볼 수 있는 경우에만 조직변경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할 것”인데, ○○지회는 독립된 노동조합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두 차례 조합원총회의 결의는 무효라고 판결했다.

지극히 법리적이고 당연한 결론이다. 대상판결은 지부·지회는 독립된 노동조합이 아니라 노동조합 내부기구에 불과하므로 조직형태변경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이유로 지부·지회 총회 결의를 무효라고 명시적으로 판단한 사실상 첫 법원 판결이라는 큰 의미가 있다. 그동안 유사사례들(2009.3.12, 대법 2008다2241 판결 등)의 경우 큰 틀에서는 지부·지회의 독립된 노동조합 해당성에 대한 상기 판단과 입장을 같이 하면서도 대개 절차상의 하자 문제를 중심으로 결론을 내려온 경향이 있었다(이 사건의 경우에도 총회소집권자의 자격 문제, 일부 조합원들의 총회 출입 거부 문제, 투표과정에서 비밀․자유투표의 원칙이 침해된 문제 등 여러 가지 절차상 하자문제도 다뤄졌으나 절차상 하자를 따질 것도 없이 주체가 위법하다는 원칙적인 판결이 행해졌다).


3. 법·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노동조합이 아닌 노조내 단순 내부기구가 스스로 노동조합인양 권한과 기능을 행사하고자하니 문제가 된다. 하고보니 너무나 당연한 얘기를 풀고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현행 법·제도상으로도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대상 판결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노동조합의 지부·지회라도 독립된 노동조합으로 볼 수 있다면 그 역시 노동조합일 수 있다. 크게 나눠보면, 독자적인 단체성(규약 및 집행기관과 활동의 독자성)과 단체교섭(단체협약 체결 포함) 능력의 존재유무가 독립된 노동조합 여부에 대한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다. 유사사례들에 대한 법원 판결들을 살펴보면 독자적인 교섭권 유무에 보다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진짜 산업별노조라면 기업별 지부·지회에 독자적인 단체성과 교섭권을 부여할리는 없고 실제 최소한 규약 상으로는 그러한 산업별노조는 없다(있다면 그것은 이름만 산업별노조일 뿐 실체적으로는 산업별노조가 아니라고 봐야한다).

문제는 기업별노조 의식이 현행 법령에도 여전히 박혀 있고 이러한 법·제도에 의해 다시 현실이 강제된다는 것이다. 노조법 시행령 제7조(산하조직의 신고)는 “근로조건의 결정권이 있는 독립된 사업 또는 사업장에 조직된 노동단체는 지부·분회 등 명칭여하에 불구하고 법 제10조 제1항의 규정에 의한 노동조합의 설립신고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노조법상 노조내에 또 노조법상 노조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이 조항은 원래 유신체제 하에서 기존 산업별노조 체제를 무력화시키려는 의도에서 마련된 것이다. 그 동안 기업별노조가 주류였던 상황에서는 크게 문제로 부각되지 않았지만 산업별노조시대인 현 시점에서는 초기업별노조의 존립을 위태롭게 하는 이 말도 되지 않는 규정은 삭제돼야 한다.

한편 한국 노사관계 갈등의 증폭제인 노동부가 여기에서도 또 문제다. 노동부는 독립된 노조로서의 실체 여부라는 판례와 같은 기준도 아니고 단지 근로조건의 결정권이 있는 독립된 사업장에 조직돼 있는 지부(분회)인 경우에는 조직형태변경(기업별노조로 전환) 결의가 가능하다는 해석을 고수하고 있다(노동조합과-3517, 2004.12.21 등 다수). 이에 따라 조직형태변경에 반대한 노동자들도 집단탈퇴가 함께 되며 기존 초기업별노조가 체결한 단체협약의 효력도 신설되는 기업별노조에 승계된다는 입장이다. 기업별노조 의식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는데다가 산업별노조 체제를 방해하기 위한 못된 의도까지 담겨있다. 노동부 행정해석의 변경도 시급하다. 최소한 법원 판례대로만이라도 하자. 대한민국은 사법국가다.

여전히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다. 어쨌건 총회에서 다수가 결정한 것이니 “민주적 절차에 따른 다수의견 존중”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이지 않은가라는. 노동조합도 아닌 것이 법상 노동조합에게 부여되는 조직형태변경의 권한과 기능을 행사할 수는 없다는 원칙적인 얘기는 이미 누차 했으니 차치하고 또 다른 중요한 문제 몇 가지 언급해보자. 기존의 산업별노조 지부․지회가 가졌던 권리․의무를 조직적 동일성이 인정되지 않는 신설 기업별노조에게 부여할 수는 없다. 아울러 산업별노조 탈퇴를 반대하는 조합원이 이미 가지고 있는 산업별노조 조합원으로서의 권리(단결권)를 박탈시키는 것이 법리적으로는 오히려 더 불합리하다. 산업별노조 지회를 기업별노조로 바꾸고 싶다고? 그렇다면 개별적으로 산업별노조를 탈퇴하고 탈퇴한 사람들끼리 기업별노조를 신설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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