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양우람 기자
“배운 거라곤 재봉질밖에 없던 제가 사장 앞에만 서면 없던 힘이 생기더군요. 누군가를 등에 업고 싸우고 성과를 얻어 내는 일이 그렇게 짜릿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죠.”

노점노동연대 정치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영(49·사진) 위원장. 그가 반평생 넘게 몸담아 온 노동·빈민운동은 그렇게 시작됐다.

중2 때 중풍으로 아버지를 여의고 곧바로 뛰어든 생활전선. 신문배달을 위해 새벽에 집을 나서면 삼삼오오 어디론가 몰려가는 형들이 부러웠다. 알고 보니 그들이 향한 곳은 청계천 피복공장. 김 위원장은 그때부터 어깨너머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을 배우는 속도가 빨라 그는 스물넷의 나이에 재단·재봉·다림질·부착을 거쳐 한 팀의 오야(팀장)가 됐다. 작업 지휘와 함께 오야의 중요한 임무는 임금 담판이었다.

“다른 오야들이 하도 소극적이라 어린 제가 나섰는데요. 며칠을 연구해 후다(주머니 덮개) 개수당 얼마, 단추 한 개당 얼마 이런 식으로 나오니 들어줄 수밖에요. 주위의 환호성에 그렇게 기분 좋을 수가 없더군요.”

이후 주위 사람의 소개로 청계피복노조를 알게 됐다. 그날부터 김 위원장은 집회가 있는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열혈 활동가가 됐다. 그러던 중 빈민운동을 접했다. 86년 그가 살던 돈암동 일대가 재개발 구역으로 지정된 것이다.

“마구잡이로 들어오는데 매일이 싸움터였습니다. 조직국장을 맡아 싸울 세입자들을 끌어 모으는 일을 했어요. 청계천 시절의 운동이 멋모르는 치기였다면 돈암동은 그야말로 생존이 걸려 있는 전쟁터였습니다.”

부분적인 철거가 있었지만 전체의 3분의 2가 4년이나 철거작업을 버텨 냈다. 그 사이 김 위원장은 용역들과의 폭력사건에 휘말려 8개월 동안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해요. 당시 시장이 끝까지 남은 세입자들에게 영구임대아파트를 지어 주기로 했거든요.”

출소 후엔 서울시철거민협의회에서 일했다. 인천시 송현동 등 경기 일대의 철거지역을 찾아가 함께 싸우자고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7년이 흐르는 동안 아내와 딸이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그를 떠났다. 김 위원장도 살아야 했다. 볼펜·컵·신발 등 가만 둬도 썩지 않는 것이라면 뭐든지 팔았다. 그가 굳이 품목을 한정한 것은 전국노점상연합회 활동을 병행했기 때문이다. 이후 뜻이 맞는 동료들을 모았다. 그리고 지난해 노점노동연대를 결성했다.

“노점을 허용하는 기초자치단체도 있는데요. 알고 보면 생색내기입니다. 비싼 자릿세를 내고 들어가 봐야 장사가 되지 않거든요. 문제는 이런 것들을 노점단체 내부적으로도 알고 있다는 겁니다.”

피복노동자에서 철거민으로, 철거민에서 노점상으로…. 김 위원장의 삶에는 지친 도시빈민의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꾼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영세민의 경제활동을 돕는 자활후견기관에서 일하고 싶습니다. 찾아보면 이분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거든요. 자격증이 필요하다면 열심히 공부해 볼 생각입니다. 어려운 사람들이 한 사람의 몫을 해내는 데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너무 뿌듯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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