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오전 7시께 서울 여의도 KB국민은행 본점 앞. 출근하기에 조금 이른 시각인데도 소란스러웠다. 퇴출성 제도인 성과향상추진본부 폐지 등 노사합의 이행을 요구하며 경영진 퇴진투쟁을 벌이고 있는 금융노조 KB국민은행지부(위원장 박병권) 소속 상임간부 20여명이 분주히 'KB희망버스'에 몸을 실었다.

희망버스를 타고 전국순회 투쟁에 나서는 지부의 첫 목적지는 부산이었다. KB희망버스는 부산을 시작으로 대구·광주·대전을 거쳐 다시 서울로 올라간다. 이들을 배웅한 10여명의 간부들은 서울 여의도 본점에 있는 천막농성장을 지킨다. 지부는 이달 5일부터 무기한 천막농성을 하고 있다.



“현장 목소리 들으러 왔어요”



이른 아침 출발했지만 부산에 도착하니 오후 1시에 가까웠다. 부산시 금정구 두실역지점에 도착한 간부들은 서둘러 조합원들을 만났다. 현장의 힘든 점과 지부의 활동에 대해 묻기도 했다.

영업 중인 은행 내에서 지부의 요구사항을 담은 피켓을 들고 유인물을 배포했다. 은행에 방문한 고객들에게도 지부의 투쟁내용을 알렸다. 두실역지점을 시작으로 구서동지점·서면중앙지점·가야지점 등 10여 군데를 돌면서 이날 저녁 부산중앙지점 앞에서 열리는 집회 참석을 독려했다. 조합원들은 “꼭 참석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부산·경남지역에는 116개의 KB국민은행 지점이 있다. 간부들은 “더 많은 지점을 가지 못해 안타깝다”며 아쉬워했다. 지부 관계자는 “직접 영업점에 와서 현장 조합원들을 만나니 조합이 살아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한국노총 금융노동자, 민주노총 조선노동자 만나다



다른 간부들이 저녁집회를 준비하는 동안 박병권 위원장은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로 향했다.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며 한진중 영도조선소 85호 크레인에서 고공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만나기 위해서다.

영도조선소 앞 도로, 85호 크레인이 마주 보이는 곳에 민주노총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조합원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박 위원장은 간부들이 모은 투쟁기금을 한진중지회 관계자에게 전달하고, 김 지도위원과 전화통화를 했다.

“멀리서나마 응원해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 KB국민은행지부도 노조탄압에 맞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우리 직원들도 함께 응원하겠습니다.”

김진숙 지도위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맙습니다.”

박 위원장은 “힘내세요”라고 소리쳤다. 김인수 한진중 정리해고철폐투쟁위원회 부대표는 “관심을 가져 달라. 반드시 이기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그것밖에는 마음을 표할 길이 없다”며 박 위원장의 손을 꼭 잡았다.

짧은 만남이었다. 하지만 한국노총 금융노동자들과 민주노총 조선노동자들의 흔치 않은 만남이었다. 이런 모습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약속 어기는데, 누굴 믿고 일합니까”



시중은행은 전국에 지점이 흩어져 있다. 집회가 서울로 집중되다 보니 먼 지역 조합원들은 참여하기조차 힘들다. 지방 조합원들에게 서울의 간부들이 찾아와 여는 집회는 좀처럼 접하기 어려운 기회다.

어둑해지기 시작한 이날 오후 7시. 집회가 열리는 부산 중구 부산중앙지점 앞에 일을 마치고 온 조합원들이 속속 자리를 채웠다. 퇴근 후 바로 온 탓에 옹기종기 모여 김밥으로 배를 채웠다.

집회에 참가한 조합원들은 높은 노동강도를 호소했다. 수영지점에서 근무하는 김효정(42) 조합원은 “지난해 인원이 줄어든 탓에 인력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은행측이 과다한 영업목표를 요구하고, 마땅한 대가도 없다”고 속상해했다.

전수경(36) 조합원은 “노조 소식지를 통해 알고는 있지만 협상 진행상황과 앞으로의 투쟁방향을 직접 듣고 싶어서 나왔다”며 “일하는 사람에게는 고용안정이 정말 중요한 일인데 늘 불안하다”고 말했다.

얼마 전 계약직에서 정규직으로 전환됐다고 밝힌 구아무개(31) 조합원은 “불만은 쌓여 가는데 표출할 데가 없으니 집회에서라도 크게 외치고 싶어 집회에 참석했다”며 “지방에서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박아무개(29) 조합원은 “노사가 이미 합의한 사항을 경영진이 일방적으로 지키지 않고 있다”며 “서로 신의가 무너진 상황에서 조합원들은 누굴 믿고 일해야 하나”라고 되물었다.



“제대로 싸워 주세요”



대다수 조합원들은 갑자기 싸늘해진 날씨 탓에 몸을 움츠리면서도 집회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안아무개(40) 조합원은“부산에서 집회가 열려 가슴이 벅차다”고 했다.

“과도한 실적경쟁으로 직원 간 관계가 미묘하게 틀어졌어요. 같이 일하는 동료들인데 실적에 의해 줄 세워지니, 늘 안타깝고 마음이 아프죠.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다함께 모이니 동질감이 생깁니다. ‘아, 우리 모두 같은 마음이구나’ 하는 안도감도 생깁니다.”

이날 집회에는 KB국민은행지부 조합원 700여명이 모였다. 김문호 금융노조 위원장과 간부들과 금융노조 산하 부산은행지부·경남은행지부·기술보증기금지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이해수 한국노총 부산지역본부 의장도 집회에 함께했다.

‘KB희망버스’는 이날 부산을 떠나 대구(22일)와 광주(23일)를 거쳐 대전(27일)으로 향한다. 다음달 중순에는 서울 수도권지역 조합원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집회를 연다. 이날 저녁 부산집회가 끝나자마자 한 조합원이 박 위원장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직원들 모두가 하루하루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데, 은행에서는 특별한 희망도 보여 주지 않으면서 더 충성하라고만 합니다. 이번달만 활동성 프로모션 자폭통장(영업목표를 채우기 위해 직원이 임의로 만드는 통장)이 300만원을 넘었네요. 힘드시겠지만 제대로 싸워 주세요. 머리 숙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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