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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샌델의 ‘정의’를 읽으며 ‘정의’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고 있다. 정의는 ‘의롭고’, ‘도리 있는’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 속에서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각자가 위치한 존재적 상황에서만 해석하려 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것에 대한 정보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해 무지로 인한 배타적 생각에 갇혀 있는 경우도 있다. 오늘은 이 수많은 정의롭지 못한 상황 중 노동자의 절반 가량(서비스노동을 하는 취업자의 규모가 노동자의 50%에 육박한다)을 침몰시킬 수 있는 웃음병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한다.

2009년 통계청 통계는 10대에서 30대 사이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이라는 놀라운 결과를 보여 준다. 우리 사회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제 아이를 잡아먹는 사투르누스’ 꼴이 돼 버린 것 같다. 제 아비를 살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사투르누스는 똑같은 결과를 겪을 것이라는 신탁을 거부하기 위해 자식들을 삼킨다. 그러나 결국 아들 제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만다.

우리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 하나하나를 삼키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자살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젊은 베르테르’류의 감성적 자살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20~30대 취업노동자 계층을 자살로 몰아가는 데 영향을 미치는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웃음병’일 것이라 예측한다.

감정노동으로 인해 만들어지는 이 병은 우울증 등의 정신과적 문제를 동반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는 감정노동으로 인한 정신과적 문제가 우리나라처럼 크게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소위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에서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입장과 제공받는 입장이 상호 권리와 의무에 부합되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제공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일어나는 마찰도 상대적으로 매우 적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우리식 소비자의 잣대로 보면 ‘화가 치밀’ 때도 많다. 필자의 경험에 따르면 유럽의 한 호텔에서 예약한 객실안내를 받으려 한 시간을 넘게 기다리는데도 종업원은 개인적인 수다를 떨고 내실 쪽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항의하는 고객이 없었다. 결국 참지 못한 나는 화를 내고 말았다.

나는 우리나라 소비자의 생각과 행동이 바뀌었으면 한다. 물론 웃음병을 초래하는 것은 소비자의 소비행태 때문만은 아니다. 총자본의 ‘친절 이데올로기’나 개별 기업의 ‘웃음 얹어 팔기 전략’, 소수의 ‘진상 고객’도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탓은 없을까?

노동자들도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노동자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다. 그래서 노동자의 삶은 생산영역과 소비영역이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다. 자본이 요구하는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없다면 소비영역에서는 다른 노동자의 웃음병을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우리가 그런 적은 없었는지. 이러한 행동은 함께 붙어 있는 생산영역에서 관리자의 부당하고 억압적인 요구에 침묵하는 결과를 낳게 할 수도 있다. 두 영역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이는 결국 사회를 비정상적으로 순환시키는 구조를 낳을 것이다. 나는 우리 노동자들이 정의로운 소비자로서 선택을 할 것이라고 판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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