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소선 어머니가 7일 노동자 곁을 떠나 전태일 열사에게로 돌아갔다. 어머니가 타계한 지 5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 항거한 지 41년 만이다. 사람들은 "이제 태일이 곁에서 행복하시라"고 입을 모았다.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에서 노동자의 어머니로, 가진 것 없어 핍박받는 모든 이의 어머니로 존경받았던 고 이소선 어머니. 그는 이날 오후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열사 묘소 인근, 아들 곁에 묻혀 영면했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모두가 평등한 거야. 모두가 인권을 갖고 태어난 거지. 배우고 돈 있다고 사람 차별하는 그런 세상, 바꿔야 해. 나는 못 배우고 돈 없지만 알 건 알고 할 말은 하고 살아. 노동자가 하나 돼야 해. 하나 돼 싸워야 세상을 바꿀 수 있어. 다만 죽지 말아야 해. 죽지 말고 살아서 죽을 힘을 다해 싸우란 말야."<고 이소선 어머니가 생전에 남긴 말 중에서>

꽃상여 타고 떠난 노동자의 어머니

7일 오전 일찍부터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은 부산했다. 지난 6일 오후 추모제에 참가했다 밤을 새운 이들과 어머니의 영정을 들고 부산 한진중공업 김진숙씨를 만나고 돌아온 이들. 이른 새벽 일어나 서울대병원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던 이들까지 500여명의 사람들이 장례식장과 그 주변을 가득 메웠다.

밤새 꽃상여가 만들어졌다. 고인을 태우고 장지까지 함께할 꽃가마다.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은 지난밤 장례식장을 지켰고, 김영훈 민주노총 위원장은 고인의 영정을 안고 한진중공업을 들러 돌아왔다. 이날 오전 7시30분께 이재오 특임장관이 조용히 장례식장 1층 발인식장에 들어섰고, 곧이어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왔다. 양대 노총 위원장이 발인식 자리 맨 앞줄에 나란히 앉았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오전 8시 유가족들이 고인의 영정을 안고 들어서자 발인 예배가 시작됐다. 이제 어머니를 보내야 할 시간이다.

그러나 이날로 245일째 한진중공업 영도조선소 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전날 밤 추모제 전화연결에서 "애통해서 어머니를 보내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는 "살아서 희망버스 타시겠다더니 이렇게 영정으로 저를 만나러 오셨느냐"며 "얼굴을 마주 보지도, 승리의 소식도 전해 드리지 못해 보내드릴 수 없다"고 애통한 마음을 전했다. 사람들이 덩달아 어깨를 들썩였다.

떠나는 어머니, 흐느끼는 사람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기 마련. 사람살이의 그 아픔은 누구도 어찌할 수 없었다. 꽃상여는 김 지도위원과 수많은 사람들의 애통한 마음을 뒤로 하고 오전 9시10분께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떠났다.
 

 
전태일 열사의 영정을 끌어안고 오열하던 젊은 시절 어머니의 모습(대형 그림판)을 앞세우고, 모두가 하나 되라는 듯 두 팔 벌려 사람을 끌어안으려는 노년 시절 어머니 모습을 뒤세운 채, 행렬은 움직였다. 꽃상여가 양대 노총 깃발과 함께 뒤따랐다. 100여명으로 구성된 풍물패가 꽹과리·장구·북을 두들겨 어머니 가는 길을 알렸다. 유가족 50여명과 300여명의 추모객들이 또 그 뒤를 이었다.

길을 지나던 여학생들이 "이건 뭐지"라며 궁금한 눈빛으로 행렬의 움직임을 지켜봤고, 그 말을 굳이 들었던 한 오토바이 운전기사는 "전태일 몰라요?"라면서 정답 아닌 정답을 그들에게 전해 줬다. 방송차량 마이크에선 쉴 새 없이 "이소선 어머니를 기억해 달라"고 시민에게 호소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결식이 진행될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앞 차도에는 또 다른 800여명의 추모객들이 다가올 장례행렬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날 장례식은 노동·시민단체와 일반시민까지 참여하는 ‘민주사회장’으로 치러졌다. 김영훈·이용득 위원장과 배은심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협의회 회장이 상임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노동자와 시민 1만여명이 장례위원으로 참여했다.

이용득·김영훈 “어머니 유지 이어받겠다”

"참된 평등·해방을 알려 주셨던 어머니. 고통 받는 이들과 언제나 함께했던 어머니. 우리 모두 어머니가 됩시다. 어머니를 보내는 오늘 이 자리가 수천수백의 어머니가 부활하는 자리로 만듭시다."(장기표 장례위원회 호상)

 


"(아들이 죽고) 괴로움에 지쳐 따라 죽고 싶었던 저는 어머니의 손을 잡으면서 오늘까지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가시다니요. 꿈에라도 봤으면 좋겠다던 그 보고 싶던 아들은 만나셨는지요. 얼싸 안고 소리 내 울었는지요."(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

오전 10시께 영결식이 시작됐다. 1천여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학로 3차선을 가득 메웠다. 각 정당·단체 대표와 관계자 등 각계각층 인사들이 함께했다. 백기완 통일문제연구소장은 무대에 올라 "너무 빨리 가셨다"며 "이소선 어머니, 어머니"를 외쳐 불렀다. '전태일 평전'을 지은 고 조영래 변호사의 부인 이옥경씨는 "어머니의 고투와 사랑이 있었기에 전태일이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살았다"며 "하늘에서 전태일과 조영래와 행복하시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용득·김영훈 위원장은 “양대 노총 통합, 노동자가 하나 돼라”는 이소선 어머니의 유지에 따라 연대와 단결을 강조했다. 이용득 위원장은 "생전에 그토록 원하시던 노동자의 단결과 통일을 보여드리지 못한 불효가 심장에 박혀 눈물이 돼 흐르고 있다"며 "그러나 여기 이 자리, 어머니께서 하나 되길 바라시던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함께 모여 국화꽃을 들고 있다"고 말했다. 또 "어머니의 뜻이 헛되지 않도록 양대 노총이 힘을 모아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김영훈 위원장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함께해야 한다는 말씀 가슴에 새겨, 정리해고·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해 싸우겠다"며 "사무치게 보고 싶었던 전태일 열사 곁으로, 가슴에 묻었던 아들 곁으로 편히 가시라"고 영면을 기원했다.

평화시장 상인들도 조문행렬 동참

대학로에서 50여분을 걸어 오후 1시께 도착한 청계천 전태일 다리. 이소선 어머니는 아들을 만났다. 전태일 열사 동상 앞에 어머니 영정이 놓였다. 사람들이 국화를 들고 헌화했다.

청계천 일대 평화·동화·통일시장에서 일하던 상인들도 모여들었다. 청계천 주변에서 옷장사를 한다던 정아무개(62)씨는 "70년 11월 전태일이 분신한 것을 직접 목격했는데, 나와 나이가 같아서 기억에 많이 남았다"며 "일하면서 듣는 라디오에서 이소선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운 마음에 이 자리에 오게 됐다"고 말했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와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와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가 이소선 어머니에게 드리는 조사를 각각 낭독했다. 행사 끝 무렵 참가자 모두가 함께 부른 '아침이슬' 노래가 서로의 목소리를 타고 울리면서 청계천 중간에 두고 높다랗게 솟아오른 빌딩들 사이로 하늘에 올랐다. 오후 2시30분께 운구차가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으로 향했다.

전태일·이소선 있기에 우리가 있었다

 

이소선 어머니는 그렇게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을, 대학로 영결식장을, 아들 전태일이 몸을 불살랐던 청계천 평화시장을 그리고 노동자 곁을 떠났다. 그는 아들 전태일이 묻힌 묘역 오른쪽 뒤편, 직선거리로 약 8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묻혔다. 장례위 관계자는 "어머니가 전태일 열사를 뒤에서 왼편으로 껴안는 모습을 그리면서 장지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전태일 어머니로 22년, 노동자 어머니로 41년을 살았던 고 이소선 어머니. 70년 11월13일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후 모든 고통·슬픔을 이겨 내고 같은해 청계피복노조를 결성, 아들이 남긴 뜻을 이루기 위해 40여년을 노동운동에 몸 받쳤던 이소선 어머니. 전태일이 있었기에 어머니가 있었지만, 어머니가 있었기에 전태일도 있었다. 그리고 전태일과 어머니가 있었기에 노동자들이 있었다.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자 고 이소선 어머니의 차남인 전태삼씨는 "‘사랑하고, 불의와 타협하지 말고, 어려운 일을 피해 가려 하지 마라’는 것이 늘 어머니가 저에게 당부하셨던 말씀"이라며 "어머니를 보내더라도 그 말씀만큼은 마음에 새기고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전씨는 이어 "지난 5일의 장례기간 찾아주신 여러분, 여러분의 눈빛에서 태일이 형의 눈빛을 봤다"며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모두가 태일이 형이자 어머니"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