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밤, 고 이소선 어머니의 영정을 든 장례위원이 어머니가 살았던 종로구 창신동 집 앞에 섰다. 그 옆 작은 봉제공장에서 미싱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때 여기 3층 옷가게에서 일하고 있었거든요. 전태일 열사를 본 적은 없지만 소문은 많이 들었어요.”

청계천 평화시장 3층에서 옷가게를 운영하는 김옥심(79)씨. 김씨는 전태일 열사가 분신했던 70년부터 ‘전태일’과 ‘이소선’이라는 이름을 들었다고 한다.

“신기한 것은 분신할 때에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대단한 화제가 되지 못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많이 알려지더라고요. 40년이 지난 지금도 여기 사람들 중에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김씨는 “아마도 이소선씨가 아들의 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5일 밤 청계천 평화시장. 쇼핑객들이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분주하게 오가는 바깥 풍경과는 달리 상가 내부는 한산했다. 쪽방에 몸을 구기고 혼자 저녁식사를 하거나, 식사를 마치고 누워서 잠을 청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노동자·상인들 중 ‘전태일’ 또는 ‘이소선’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이곳에서 8년째 옷가게를 하고 있다는 정현덕(53)씨는 지난 3일 TV뉴스를 보다 고 이소선 여사가 운명했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한다. 정씨는 “가시는 길이 평안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 번도 뵙지 못한 분이지만 가슴이 아팠어요. 체구도 작고 연약해 보이시는 분이 자식과의 약속을 지킨다고 누구보다 강인한 삶을 사셨잖아요.”

아직도 ‘미싱’은 돌아가고…“가시는 길 평안했으면”

전태일재단과 고 이소선 여사의 자택이 위치한 서울 창신동 일대 봉제공장. 골목길 굽이굽이에 있는 가정집 건물에서 미싱 돌아가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밖은 북적대고 안에는 한산했던 평화시장과는 사뭇 달랐다. 늦은 밤에도 미싱 돌아가는 소리로 넘쳐났다. 가족끼리 사장과 직원을 하는 ‘가내수공업’ 형태의 업체가 많기 때문이다.

작업에 몰두한 노동자들은 ‘전태일’이나 ‘이소선’ 얘기를 하면 “바쁘다”며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말문을 한번 열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소선 여사와 전태일 열사에 대해 고마움과 안타까움을 내비쳤다.

창신동에서 30년째 재봉틀 공급·관리 일을 하고 있다는 손아무개(50)씨는 “이소선씨가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많이 아팠다”며 “그동안 고생 많이 하셨고 편히 쉬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예전과 달리 지금은 하루종일 먼지 마시면서 작업하지는 않아요. 휴일에는 놀러가고 여름에는 휴가도 가요. 전태일씨나 이소선씨 같은 분들 뜻이 전해져 내려왔기 때문인 거 같아요.”

비교적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도 한마디 거들었다. 추천수(38)씨는 “전태일씨가 나하고 같은 직업이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소선 여사의 대해서는 “말주변이 없어서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도 “그냥 (마음이) 찡했다”고 안타까워했다.

30년째 재단일을 하고 있다는 정주복(56)씨는 고인의 비보를 접하고 “아! 가셨구나”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옛날에는 근무환경이 나빴어요. 지금도 좋은 편은 아니지만 그때보다는 많이 좋아졌지요. 사람들이 다 ‘그 양반 덕’이라고 합니다. 자식 먼저 보내고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어요.”

“어머니께 진 빚, 어떻게 갚지요?”

마침 이날은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민주사회장 장례위원회’가 청계천 일대를 행진하는 추모행사를 여는 날이었다. 추모행렬이 창신동에 도착했다. 자신의 나이를 “열다섯 살”이라고 밝힌 태원이는 친구의 초를 입으로 불어 끄고 키득거렸다.

창신동의 공부방 ‘참 신나는 학교’에서 선생님과 함께 왔다고 한다. “선생님께서 여기 나오면 이소선 할머니에 대해 알려 주신다고 해서 나왔어요.”

공부방 선생님 서아름(26)씨는 “아이들 부모님들은 대부분 이 주변에서 봉제일을 하고 계신다”며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의 역사를 알려 주고 싶어서 데리고 나왔다”고 말했다.

“이소선 어머니와 개인적인 관계는 없어요. 하지만 그분은 존재만으로도 힘이 느껴졌어요. 시대를 살아온 여성의 힘이랄까. 그분의 삶을 생각하면 저도 힘이 나요.”

행사가 시작된 청계천 전태일다리에서부터 촛불을 들고 따라온 오경숙(42)씨는 "대학시절부터 전태일과 이소선을 가슴에 새겨 살고자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잊고 살았다"고 아쉬워했다.

“졸업하고 결혼하면서 혼자서만 열심히 살았어요.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듣고 ‘이 자리에도 안 오면 이 빚을 어떻게 갚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잊고 살았다는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오씨의 목소리는 떨렸다. 울먹이고 있었다.

젊은 시절 미싱을 돌려서 ‘사장’이 된 청계천의 상인들, 늦은 밤까지 봉제기를 돌려야 하는 창신동의 미싱공, 지금은 주부가 된 여대생도 고 이소선 여사를 추모했다. 고인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마지막 가는 길을 함께하고 있었다.
 

 

전태일 장례 1주일 만에 청계피복노조 결성


1970년, 고 이소선 여사는 전태일 열사 장례를 치르고 1주일 만에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했다. 가슴에 묻은 장남이 생전에 못다 한 일을 해낸 것이다. 이후 4년 동안 낮에는 노조가 만든 평화시장 간이식당에서 일하고, 밤에는 노조 사무실에서 일했다.

유신시대 노동운동의 상징이었던 청계피복노조는 81년 계엄당국에 의해 해산됐다. 이 여사는 노조 복구를 위해 서울 서초동에 있는 ‘아프리 사무실’ 점거농성을 주도했다가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과 계엄법 위반으로 구속돼 10개월의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후 청계피복노조는 3년 만인 84년 재결성됐다. 70년 고인과 함께 청계피복노조 결성을 주도했던 장기표 녹색사민당 창당준비위원회 위원장은 “어머니께서 노조 결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후 노조는 민주노조 운동의 초석이 됐다”고 회고했다.
 



김학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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