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근본주의자들이 패배했다. 무상급식을 복지 포퓰리즘이라 비난하며 균형재정을 위해 망국적 무상급식 정책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한 현 정부 경제정책 담당자·보수언론·한나라당이 패배했다. 서울시 주민 75%는 무상급식 반대에 대한 찬반투표에서 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렇다면 이번 주민투표를 통해 진보진영이 승리했다고 할 수 있을까. 아니다. 주민투표 무산은 예산 부담도 그렇게 크지 않은 초·중학생에 대한 무상급식 여부를 가지고 주민투표까지 감행한 오세훈 서울시장의 ‘자뻑’이었지 진보진영에 대한 강한 지지는 아니었다. 재정 균형을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을 해야 한다는 시장 근본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는 시민들에게 여전히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보수언론은 지금도 오세훈 시장의 주민투표와 보편적 복지에 대한 지지 여부를 분리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해 여론전을 펴고 있다.

진보진영이 현 정세를 보다 큰 승리로 매듭짓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점을 극복해야 한다. 우선 반MB 진영 일부도 수용하고 있는 재정 균형론이다. 민주당과 시민단체 일부는 세입과 세출이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대전제하에서 이명박 정권이 부자 감세를 통해 균형을 깨뜨렸다고 비판해 왔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사실 신자유주의 논리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재정이 균형을 이루는 것이 매우 예외적인 현상이었다. 20세기 자본주의 역사를 통틀어 봐도 선진국을 포함해 대부분의 국가가 세입과 세출의 균형을 이룬 해는 몇 년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80년대 이후 균형재정을 핵심의제로 한 신자유주의하에서도 대부분의 국가들은 적자재정을 계속해 왔다. 공급과 수요의 일치, 수요자와 공급자의 합리적 기대, 시장에 대한 완벽한 정보 등 시장의 완전한 작동을 전제한 정부 재정의 중립성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시장 근본주의자들이 재정 균형을 계속해서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이들의 핵심은 복지지출 수준이 아니다. 인플레이션이다. 적자재정이 가져오는 인플레이션이 금융자본의 이해와 정면충돌하기 때문이다. 올해 초부터 재정긴축을 요구해 온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의 신용평가 잣대도 바로 재정적자가 계속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금융자본이 국가에 보내는 ‘신뢰’가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국가 신용이란 국제금융자본의 정부에 대한 신뢰수준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90년대 이래 3% 내외의 인플레이션과 균형재정이 경제학의 절대 진리가 됐으니 금융자본의 투쟁은 승리한 셈이다.

진보진영은 균형재정 프레임을 벗어나야 한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핵심의제 속에서 논쟁을 펼쳐서는 승산이 별로 없다. 진보진영이 만들어야 할 중심 의제는 이번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투쟁, 유성기업 심야노동철폐투쟁이 의제화한 고용·노동시간·임금 등 노동권을 중심으로 한 것들이다. 이렇게 노동권을 중심에 놓게 되면 노동을 착취해 쌓아 올린 재벌들의 부, 어떠한 부가가치도 생산하지 않으며 오직 투기를 통해 수탈한 금융자본의 부, 이들에게는 한없이 관용적인 정부의 태도가 또한 중심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균형재정이 계급적 갈등이 불분명한 세입과 세출의 문제라면, 노동권 문제는 계급적 갈등이 첨예한 착취와 노동-자본 간의 분배 문제다. 한나라당은 균형재정 관점하에서 복지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모든 시민들을 납세자로 주체화하며 세금부담을 이야기하고, 부자들을 복지 수혜자로 포함시키며 비효율성을 주장했다. 한나라당 복지 프레임에서는 납세자의 부담과 지출의 효율성 문제만이 남는다.

하지만 노동-자본의 계급투쟁 관점에서 복지 문제는 재벌이 독점하는 부를 재분배하고 통제하는 문제, 저임금·장시간 노동으로 인해 파괴되는 생존권 대책으로 임금·노동시간 개선 문제가 중심으로 등장한다. 이 과정에서 재벌 증세·부자 증세·노동복지 확대 등 세입·세출과 관련한 문제도 자연스레 의제가 될 것이다.

서울시 주민투표가 무산된 이후 이번 주말에는 4차 희망버스 행사가 서울에서 열린다. 정리해고 문제를 의제로 한 희망버스가 노동권을 중심에 둔 복지 프레임을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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