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신문은 지난 100일 남짓 동안 ‘강남 좌파’를 소재로 12건의 기사를 썼다. 대략 열흘에 한 번꼴로 화려하게 지면을 채웠다. 주로 오피니언면을 중심으로 배치했지만 종합면과 사회면에도 등장한다. 단연 압권은 지난달 27일 24면 문화면에 실린 <강남 화랑가에 ‘젊은 돌풍’ 분다>는 제목의 기사였다. 이 기사는 ‘강남 좌파’ 애호가들을 겨냥한 공간이라고 입소문 난 비하이브의 천영미 개인전 등 청담동과 신사동의 젊은 미니 화랑들을 소개했다.

역시 한겨레 지면과 책으로 ‘강남좌파’와 거리를 뒀던 강준만 교수를 둘러싸고 2006년과 2011년 논쟁의 동질성과 차이점을 대비하는 기사도 많았다.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대중매체의 형식적 한계 때문에 논쟁은 찬성과 반대로 편 가르는 방식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한겨레가 띄운 ‘강남 좌파’ 의제는 보수신문에도 옮겨 갔다. 지난 5일 중앙일보는 <강남좌파 대 노동자우파>라는 칼럼으로 응수했다. 이 정권 시작과 함께해 왔던 강원택 서울대 정외과 교수는 이 칼럼을 “새삼스럽게 세간의 이야기 감이 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이른바 강남좌파”라는 문장으로 열었다. 강 교수는 “강남좌파의 모태는 바로 한나라당”이라는 이상한 결론을 이끌어 냈다.

뜬구름 잡던 몽상가들의 글쓰기는 구체적인 현안에도 옮겨 붙었다. 동아일보는 지난 6일 <구로우파가 무상급식 거부할 이유>라는 제목의 송평인 논설위원 기명칼럼에서 ‘강남좌파’의 대항 주제어를 ‘구로우파’로 잡고 나섰다. 그는 ‘구로우파’를 ‘강남좌파'의 대칭개념으로 중산층 내에서 상대적으로 하위권 소득그룹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구로우파가 전면 무상급식에 반대표를 던진다면 그건 작은 기적이고 한국의 미래는 희망이 있다”고 설득했다.

지면의 논쟁은 뜨거운데, 정작 뜨거운 여름을 사는 사람들 눈엔 참 허무해 보인다. 지난달 27일자 한겨레 34면의 <논쟁 / ‘강남좌파’, 어떻게 바라봐야 하나?>는 참 생뚱맞다. “진보의 상징적 효과에 과도하게 의존”한다는 비판론자나 “이질감 주지만 진보 외연확장에 기여”할 것이라는 찬성론자 모두 현실 세계와 거리가 멀다. 어쩌면 이토록 지면을 사유화할 수 있는가. 강남좌파 논쟁 옆엔 늘 문재인·문성근·이해찬·조국 등의 야권통합 추진 기사가 쌍두마차처럼 휘달린다.

집권 전 인수위 단계부터 삼성이 던져 준 보고서로 시작해, 첫 개각 때 법무부 빅3 중 하나인 검찰국장을 삼성가의 사돈으로 앉혔던 참여정부는 집권 말기 김용철 변호사가 그 사돈을 뇌물 전달자로 폭로했을 때도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정부의 청와대 핵심참모로, 장관으로, 위원회 상임위원으로 있었던 자들이 벌이는 전적으로 추상명사에 의존한 단체와 모임이 진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들이 말하는 ‘혁신’과 ‘통합’에는 왠지 노동자의 피냄새가 진동한다.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보다도 더 치열하게 책방을 순례해 왔던 임종업 기자가 지난 5일 한겨레에 쓴 칼럼 <피동형 기자들>은 “사실을 명료하고 책임 있게 보도해야 할 매스컴이 피동형 문장을 자주 쓴다는 게 아이러니”라고 했다. 공감하지만 ‘아이러니’ 하진 않다. 임 기자는 80년 신군부 시절의 신문사설을 인용해 이런 피동형 기사를 비판했지만 근대신문의 출발지인 대한매일신보부터 우리 언론은 늘 “알려졌다, 관측된다”는 식으로 줄곧 피동형만 써 왔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제발 피동형 기사만 조용히 써다오. 어쭙잖게 ‘노사정 대화기구’ 같은 선무당을 대안이라고 우기거나, 되지도 않는 논쟁거리나 만들지 말고. 땅으로 내려와 팩트 하나라도 더 챙겨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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