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복수노조·창구단일화 제도와 관련해 우려했던 시한폭탄이 터졌다.
 
최근 법원이 "이 법 시행일 당시 교섭 중인 노조는 교섭대표노조로 본다"는 노조법 부칙 제4조와 관련해 "법 시행일은 2011년 7월1일"이라는 가처분 결정을 내놓자 노사관계가 예고된 혼란 속으로 빠져 들고 있다. 물론 혼란의 한가운데 고용노동부가 있다.

노동부는 이와 관련해 8일 보도설명자료를 내고 “노조법 부칙 제4조의 법 시행일은 2010년 1월1일이 맞다”며 "법 시행일을 2011년 7월1일로 해석할 경우 복수노조 시행 이후 신설되는 노조들의 교섭권이 박탈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기존노조가 올해 7월1일 현재 교섭 중이라는 이유만으로 교섭대표노조로 인정하면 신설노조의 교섭권이 2년간 제한된다는 것이다. 노동부는 한발 더 나아가 “법원이 신설노조의 교섭권에 대한 고려 없이 기존노조의 기득권 보호에 치우친 결정을 내렸다”고 법원을 대놓고 비난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3일 금속노조가 KEC를 상대로 제기한 단체교섭응낙 가처분 신청에서 "노조법 부칙 제4조의 법 시행일은 2011년 7월1일"이라고 결정했다. 지난달 1일 복수노조 허용 이후 교섭대표권에 대한 최초의 판례인데, 노동계의 주장이 대부분 반영됐다. 그러나 노동부는 “가처분 결정일 뿐”이라며 법원의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법원 교섭대표노조, 행정해석 교섭대표노조 병존?

금속노조 KEC지회는 법원의 결정으로 교섭대표노조 지위를 확보하게 됐다. 그런데 마음이 편하지는 않다. 지회 관계자는 “노동부가 잘못된 행정해석만 내리지 않았더라도 사업장 분위기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혀를 찼다. 지회가 법원의 결정 사실을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조합원에게 발송하자, 올해 7월1일 설립된 KEC노조가 "거짓사실 유포"라고 반발하고 나서면서 노-노 간에 감정대립이 격화됐기 때문이다.
 
조합원수 467명인 KEC노조는 지난달 말 과반수 노조 이의제기 신청을 경북지방노동위원회에 제기한 상태다. KEC지회 조합원은 618명이다. 두 노조의 조합원수를 합치면 KEC 전체 노동자수인 710명을 훌쩍 넘는다. 금속노조가 "회사가 노조탈퇴서 작성을 강요했다"고 반발하면서 조합원수를 둘러싼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만약 경북지노위가 노동부의 행정해석을 근거로 신설노조인 KEC노조를 교섭대표노조로 인정할 경우 KEC에는 법원 결정에 의한 교섭대표노조와 노동부 행정해석에 따른 교섭대표노조 2개가 병존하는 희한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KEC지회가 우려하는 것은 현재 이른바 ‘어용노조’로 의심받는 KEC노조가 회사의 구조조정안에 동의하는 협약을 체결하는 것이다. 지회 관계자는 “회사가 지난해부터 호시탐탐 아웃소싱 추진을 노려 왔다”며 “만약 노동부의 잘못된 해석으로 KEC노조가 교섭대표노조가 돼 단체협약을 체결할 경우 앞으로 대법원 판결까지 긴 시간 동안 법적소송을 벌여야 한다”고 말했다. 11일 경북지노위의 결정을 앞두고 KEC지회는 벌써 행정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예고된 교섭해태, 사라진 교섭대표권

경주의 유일한 시내버스 회사인 천년미소에는 복수노조 허용 첫날 2개 노조가 설립신고를 해 관심을 끌었다. 현재 이 회사에는 공공운수노조 천년미소지회(113명)·주식회사천년미소노조(104명)·경주시내버스노조(29명) 등 3개 노조가 한 지붕 아래 있다.

천년미소지회는 5월부터 6월 말까지 모두 7차례에 걸쳐 회사에 교섭을 요구했지만 회사는 단체협약 만료일(9월30일)이 석 달 넘게 남았다는 이유로 응하지 않았다. 지회는 6월28일 경북지노위에 조정신청을 냈는데, "교섭창구 단일화 절차를 밟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마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경북지노위는 '법 시행일을 2010년 1월1일로 본다'는 노동부 행정해석을 근거로 "천년미소지회는 교섭대표노조가 아니므로 조정신청을 낼 자격이 없다"고 밝혔다.

이후 회사는 2개 신설노조가 교섭요구를 했다며 창구단일화 절차를 밟았고, 현재 2개 노조가 연합해 교섭대표노조 지위를 확보한 상태다. 5월부터 교섭을 요구했던 기존노조인 천년미소지회는 졸지에 교섭권을 빼앗겨 버렸다.
 
이정호 지회장은 “회사가 입맛에 맞는 복수노조 설립을 염두에 두고 의도적으로 교섭을 해태한 후 창구단일화 절차를 앞세워 지회의 교섭권을 박탈했다”며 “법원소송으로 교섭권을 되찾을 것”이라고 말했다. 천년미소는 인천 경진운수와 함께 노동부의 행정해석을 회사가 악용해 의도적으로 교섭을 해태하고 기존노조의 교섭권을 박탈한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산별노조 교섭마저 위축시키나

노동부의 잘못된 행정해석은 산별노조 교섭마저 거꾸로 되돌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9월 산별총파업을 예고한 금융노조는 당초 지난달 쟁의조정 신청을 완료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중앙노동위원회는 노동부의 행정해석을 이유로 창구단일화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며 노조의 쟁의조정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노조는 창구단일화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밟기로 결정했다. 불법파업의 논란을 사전에 피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노조 관계자는 “법원 결정으로 노동부가 처음부터 잘못된 해석을 내렸다는 것이 입증됐다”면서도 “향후 2년간 안정적인 교섭대표권을 확보하기 위해 창구단일화 절차는 예정대로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조는 20일 전 사업장에서 창구단일화 절차가 완료되면 중노위에 다시 쟁의조정을 신청한다는 계획이다.

서울중앙지법은 KEC사건 결정문에서 "부칙 제4조의 법 시행일을 2010년 1월1일로 보게 되면, 원칙규정의 효력이 발생하기도 전에 예외규정의 적용시점을 앞당겨 정한 규정이 된다"고 지적했다. 교섭대표노조가 존재할 여지가 없는 2010년 1월1일 이후 1년6개월간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조항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복수노조가 허용되는 올해 7월1일 당시 교섭 중인 노조는 아무런 경과조치 없이 교섭권을 박탈당하게 되고, 이를 악용한 사용자의 단체협약 체결 해태도 충분히 예견된다"는 지적도 덧붙였다.

노동계는 물론이고 노동법 전문가들도 이미 지적했던 문제들이다. 이를 노동부만 ‘소수노조 교섭권’을 애써 주장하며 외면한 것이다. 사실 소수노조의 교섭권 박탈 논란은 법 시행일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본질적으로 복수노조 제도를 도입하면서 창구단일화를 강제했기 때문에 나타난 필연적인 결과다.

법원이 노조법 시행일 논란에 쐐기를 박은 만큼 창구단일화를 비롯한 노조법 개정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전망된다.

반복되는 노조법 시행일 논란, 왜? … 입법 미비가 부른 예고된 재앙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상 시행일 논란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근로시간면제(타임오프) 제도가 처음 시행된 지난해에는 노조법 부칙 제3조의 ‘이 법 시행일’을 둘러싼 공방이 벌어졌다. 노조법 부칙 제3조(단체협약에 관한 경과조치)에 따르면 노조 전임자임금 지급금지가 시행되기 전에 단체협약을 체결하면 단협 유효기간까지 전임자임금을 지급할 수 있다.

당시 노동계는 법 시행의 기준을 전임자임금 금지조항이 시행된 2010년 7월1일로 본 반면에 정부와 경영계는 개정 노조법이 시행된 2010년 1월1일로 해석했다. 지난해 1월1일 기준으로 전임자임금 금지조항이 길게는 2년6개월이나 유예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노정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이후 한국노총이 법원에 소송까지 제기했지만 국회 입법조사처는 노동부의 손을 들어줬다. 한국노총은 소송을 취하했다.

이어 올해 6월29일 대구지법은 금속노조가 고용노동부 포항지청장을 상대로 제기한 경북지역 17개 사업장 단체협약에 대한 시정명령취소 청구소송에서 “노조법 부칙 제3조의 ‘이 법 시행일’은 2010년 1월1일”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대구지법은 전임자임금 지급금지를 규정한 노조법 제24조제2항은 2010년 1월1일부터 시행하지만, 2010년 6월30일까지 그 적용을 유예하는 것이 문언상 명백하다고 밝혔다. 따라서 부칙 제3조가 정한 ‘이 법 시행일’은 2010년 1월1일이라는 것이다.

반면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3일 금속노조가 KEC를 상대로 제기한 단체교섭응낙가처분 소송에서 “법률 조항들의 문언·체계상 부칙 제4조의 ‘이 법 시행일’의 의미가 명백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며 “부칙 제4조의 의미는 규정의 입법 취지와 목적, 다른 규정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법원이 이렇게 상반된 입장을 보이는 것은 입법 과정에서의 미비가 가장 큰 원인이다. 지난해 부칙 제3조의 시행일이 논란이 되자, 노조법 개정을 주도한 추미애 민주당 의원과 노동법 전문가들은 “단협의 경과조치는 완충기간을 둬 노사갈등을 방지하기 위한 취지였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법률 조항에는 이 같은 입법취지가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

이승욱 이화여대 교수는 “법 시행일과 복수노조·창구단일화제도 시행시기에 법률상 잘못이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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