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희망버스가 갔다. 주말 3차 희망버스는 부산에 갔다. 209일째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에서 농성 중인 김진숙을 지지하고자 사람들은 부산에 몰려갔다. 그리고 밤을 새워 거리에서 노숙하며 집회를 했다. 그리고 돌아왔다. 지금 이 나라 노동운동은 1박2일 희망버스를 타고 달리고 있다. 지금 이 나라에서는 노동자의 구호는 85호 크레인에서, 그리고 희망버스에서 들린다. 크레인에서 김진숙은 소리쳤다. 희망의 사람들은 김진숙을 따라 외쳐댔다. “정리해고 철회하라.”
이 나라에서는 정리해고 철회가 희망이다. 어떻게 이 희망을 말할 수 있을까. 간단하다. 정리해고를 철회한다. 한진중공업의 대표이사 사장이라면 이 말 한마디면 된다. 이렇게 쉬운 것인데도 이게 어렵다. 아무리 수천명, 수만명이 노숙하며 수천번을 외쳐대도 희망사항일 뿐이고 희망은 되지 못한다. 오직 자본의 대리인만이 희망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사실 희망버스 이전에 한진중공업 노동자 수천명은 정리해고 철회를 외쳐댔다. 아무리 노동자 수천명이 농성하며 수천번을 외쳐댔어도 희망사항일 뿐 희망을 가져오진 못했다. 그리고 김진숙이 희망의 불씨로 남았다. 이런 것이다. 이런 게 이 세상의 권리고 법질서다. 이 권리, 이 질서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한 채 김진숙을 부르고 정리해고 철회를 외쳐대고 있다.

2. 도대체 무엇일까. 수천의 노동자에게는 없고, 대표이사 사장에게만 있다. 수만의 사람들이 아무리 노동자편을 들어 지지하고 연대해도 대표이사 사장이 희망을 말하지 않으면 희망은 없다. 이게 무엇일까. 노동자들은 수십년 노동을 통해 한진중공업의 조선소를 일으켰다. 그리고 그들이 건조한 선박을 통해 엄청난 수익을 올려 필리핀 수빅만 한진조선소까지 세웠다. 이 사업장 모두는 자본의 것이었다. 그래서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이 아무리 노동을 통해서 사업장을 성장시켜도 자본의 몫이 커질 뿐이었다. 자신의 노동을 통해서 성장시킨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몫은 없었다. 주식을 소유한 자가 회사를 소유한 자였고 사업장의 모든 것은 주식을 소유한 자에게 귀속됐다. 대표이사 사장은 주주의 대리인일 뿐이었다. 사업장의 권리에서 자본은 전부고, 노동은 전무다. 이게 법질서다. 그러니 사업장에 대한 모든 권리를 가진 자본만이 정리해고 철회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사업장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가지지 않은 노동이, 그 연대자가 정리해고 철회를 말해도 그건 희망사항일 뿐이다.

3. 희망버스는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에 관한 논의를 불러왔다. 신문에서 전문가들은 말했다. 노동시간 단축·무급휴직·고통분담·전직프로그램·직업훈련·노사정 대화기구 가동 등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 이게 이 나라에서 노동문제 전문가들이 내놓은 해법이다. 이 중 해고하지 않는 해법은 노동시간 단축·무급휴직·고통분담이고 전직프로그램·직업훈련은 해고한 뒤의 해법이고 노사정 대화기구는 이들 해법의 운용과정에서 정부가 참여해서 지원하는 것이다. 해고되는 것을 전제로 하는 해법은 살펴볼 필요가 없다. 그건 실업자 구제방안이지 정리해고 철회에 관한 해답일 수 없다. 해고하지 않는 해법으로 들고 있는 것, 즉 노동시간 단축·무급휴직·고통분담은 정리해고에 있어서 해고회피노력으로 이미 이 나라 법원이 인정하고 있는 것들이다. 노동시간 단축·무급휴직은 사용자가 아닌 노동자의 부담으로 정리해고를 피하는 방법이다. 고통분담이 자본의 분담을 말하는 것이라면 의미가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통상 노사 간의 고통분담이래도 여기서 ‘사’는 자본의 대리자인 회사 임원 등을 말하는 것인데 실질적인 노사 간의 고통분담을 통해서 정리해고를 피하는 방법이 될지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정리해고를 피하기 위한 전문가들의 해법은 어느 것이나 그저 법원의 판사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사건에서 정리해고의 정당성 요건을 판단할 때 검토하는 정도의 것이다. 그러니 그 방법은 사용자가 결정해야 할 수 있는 것이고 이 나라의 전문가들은 결국 한진중공업 자본에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1만명이 희망버스를 타고서 부산거리에서 노숙집회를 하고 정리해고 철회를 외쳤지만 이 나라에서 전문가들이 말하는 희망이라는 게 고작 이렇다. 기껏해야 노동자들이 부담을 나눠질 방법을 모색하라는 것이다.

4. 김진숙이 85호 크레인에 있는 한 또다시 희망버스는 출발할 것이다. 사람들은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의 거리에서 정리해고 철회를 외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외쳐대도 이 세상에서는 권리 없는 자의 외침이고 권리 없는 노동에 대한 연대일 뿐이다. 도대체 언제까지 희망사항으로 말해야 하는가. 아무리 외쳐대도 그들이 희망사항으로 말하고 있는 한 그건 그 희망사항을 희망으로 처분할 수 있는 자에게 그 처분을 해 달라고 주문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혹 희망버스가 괴로워서, 표를 의식한 정치권까지 뭐라 하는 게 괴로워서 한진중공업 사용자가 희망사항을 희망으로 수용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김진숙은 크레인에서 내려올 것이고, 희망버스는 더 이상 출발하지 않을 것이다. 김진숙과 희망버스가 승리자라고 희망을 만들었다고 노래하겠지만 한진중공업에서 정리해고를 철회시켰을 뿐이다. 이 세상에서 정리해고 제도는 사업장에서 노동자를 쫓아내는 법적 무기로 사용자의 권리로 살아 있고, 노동자는 사업장에 대한 아무런 권리도 없다. 그리고 희망버스만 이 나라 노동운동의 승리의 기억으로 남게 될 것이다. 다시 그 기억을 추억해대며 이 나라 노동운동은 발버둥칠 것이다.

5.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희망버스가 ‘추억버스’가 돼서는 안 된다. 노동자를 사업장에서 추방하는 사용자의 법적 무기인 정리해고 제도는 추방돼야 한다. 사업장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 사업장에서 노동자의 추방은 사업장에서 자본의 추방으로 되도록 제도를 확보해야 한다. 근로기준법에 규정된 것처럼 정리해고에 있어서 단순히 노조와의 협의로 그쳐서는 안 된다. 협의의 대상으로 노동자를 취급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이 세상의 법질서가 어떻게 노동자를 취급하고 있는 지를 말해주는 것이다. 고작 권리도 없이 추방당해도 협의로 족한 것이고, 협의했으면 아무리 완강하게 반대해도 사용자 마음대로 추방할 수 있도록 취급했다.
그러나 노동자의 노동을 통해서 사업을 하고, 사업을 확장해 왔으면 그 사업장은 이미 자본의 전유물일 수 없다. 자본은 노동을 통해서만 생산하고 재생산하고 확대재생산된다. 그걸 통해서 자본의 소유자는 사업장의 권리이자, 세상의 지배자가 된다. 이것을 이 세상의 법질서로 보장해 왔다. 그러니 노동자가 정리해고 제도에 진정으로 맞서기 위해서는 사업장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를 확보해야 한다. 사업장이 자본의 전유물일 때에는 사업장은 자본은 직접, 또는 그 대리인을 통해서 사업장의 운영과 운명을 결정하게 된다. 그게 법이다. 물론 이것을 인정하고서도 노동자가 사업장의 운영과 운명을 공동결정하도록 할 수도 있다. 독일 등의 공동결정제도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업장에서 궁극적으로 결정적으로 공동결정일 수 없다. 사업장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가 없이는 공동결정제도의 운명은 사업장의 궁극적이고 결정적인 사항에 있어서는 공동결정하지 못한다. 만약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이 지금 희망을 말한다면 이것을 말해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세계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지금 이 나라 노동운동이 희망을 쏘아 올리는 것일 것이다. 이 세상에서 노동운동은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출발했다. 이 자본주의세상의 질서가 세워지고 나서 노동자는 세상에서 권리가 없는 자였다. 권리 없는 자가 노동자였고 그래서 그는 자본에 복종해서 사업장에서 노동하고 그 산물은 모두 자본의 것으로 귀속되는 데 대해서 순응해야 했다. 바로 여기서 이 세상의 노동운동은 출발했다. 노동자가 확보해야 할 권리목록도 직접 고안했고 그것을 투쟁에 의해서 노동자의 권리목록에 올렸다.
지금 이 세상에서 노동자의 권리라는 것들은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과거 노동운동이 희망을 쏘아 올렸기 때문에 지금 노동자들은 그 나마 이 세상에서 권리를 확보한 것이다. 노동운동이 세상의 법질서에서 사용자의 권리로 정해 놓은 것들을 그대로 인정하고서 그것을 침해해서 노동자의 권리로 확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저했다면 지금 노동자의 권리는 없다. 지금 이 나라에서 전문가가 말하는 희망은 노동운동이 쏘아 올려야 하는 작은 공이 아니다. 이 나라 노동운동이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는 희망버스를 타고서 희망을 말하고자 한다면 사업장에 대한 노동자의 권리를 희망으로 쏘아 올려야 한다. 비록 이 나라 노동운동이 기력이 없다 해도 노동운동은 희망의 공을 쏘아 올려야 한다. 비록 그것이 난장이가 쏘아 올리는 작은 공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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