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대구지방법원에서 하나의 판결이 있었다. 전국금속노조가 체결한 단체협약이 개정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관할 노동지청이 노동위원회의 의결을 얻어 시정명령을 한 사건이다. 금속노조는 원고가 돼 그 시정명령이 위법하다며 소송을 제기했다.

이 판결은 많은 쟁점을 담고 있다. 특히 지난 노조법 개정에 따라 도입된 타임오프 제도와 복수노조-교섭창구 단일화 제도를 둘러싼 여러 법적 쟁점들을 포함해 노조법 일반에 관한 쟁점을 한 사건에서 압축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사건에서 다룬 쟁점들은 주되게 복수노조 허용을 내용으로 하는 노조법이 시행되기 전에 체결한 유일교섭단체 조항이 위법한 것인가, 교섭창구 단일화 제도가 도입되더라도 자율교섭을 하기로 하는 동의조항이 위법한 것인가, 해고자의 조합원자격을 인정하는 협약은 무효인가, 실제로 타임오프 조항이 시행되기 전에 체결된 협약은 2010년 7월1일 이후에는 효력이 없는가, 타임오프제도는 전임자가 아닌 다른 근로자들에게도 적용되는가, 사용자가 노동조합의 운영비를 원조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부당노동행위인가, 아니면 자주성을 침해하는 경우에만 부당노동행위인가, 노사가 합의로 단체협약 해지권 행사를 금지하기로 한 것은 정당한가 등이다.
 
이런 다양한 문제를 한 사건에서 다루게 됐다는 것이 놀라울 정도다. 그러나 이런 사건이 나타나게 된 원인은 최근 고용노동부가 과거에는 자주 사용하지 않았던 단체협약 시정명령 제도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노사 간 교섭에 따른 합의를 다시 위법성의 기준으로 다루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그 놀라움은 보기 드문 판례를 접하게 됐다는 것보다, 이 사건은 노동조합의 자주성 보호와 노사자치를 기본으로 하던 단체협약법제에 국가와 정부의 적극적 개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는 놀라움으로 바뀌게 된다.

결국 법원의 판결은 별로 새로울 것은 없었다. 삼권분립의 사고 속에서 행정부가 주도하고 입법부가 동의해 제정된 법률에 대해 그 문제의 심각성이 현실로 드러나기 전에는 법제도가 자리잡아가는 시기에 입법자의 입법의도를 침해하지 않으려는 과거 사법부의 태도에 비춰 봤을 때 이 사건의 판결은, 그것도 하급심에서의 판결은 어느 정도 예상 가능했으리라. 물론 법리적으로 문제가 되는 사안들도 있다. 이후 상급심에서 이 부분을 보다 치밀하게 다투어가면서 그 쟁점을 예각화해 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속편하게 생각하고 넘어가기에는 위 판결이 보여주는 노동조합에 대한 오해가 사뭇 심각한 수준에 가 있다고 보인다.

위 판결은 두 가지의 커다란 인식적 틀에 기반하고 있다. 먼저 이 판결은 노사관계의 결정에서 노동조합과 사용자의 합의가 존중돼야 한다는 이른바 ‘노사자치주의’보다 노조법의 규정들을 강행법률로 보고 이것이 우선 적용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노사 사이에 합의가 있더라도 형식적 규정이라고밖에 안 보이는 일부조항을 따르지 않으면 가차 없이 무효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율교섭을 하겠다는 노사 간의 합의나 해고자라도 대법원 판결이 있을 때까지 조합원으로서의 활동을 보장하겠다는 사용자와의 합의, 단체협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하지 않겠다는 사용자의 합의가 무효라고 한 부분이 바로 그 부분이다. 노사가 그리 하겠다고 합의했고, 그렇게 볼 경우 사회적으로 물의가 발생한다거나 법률이 보호하려는 원칙이 심각하게 훼손된다고 볼만한 아무런 이유도 없는데 그냥 법전에 그렇게 쓰여 있으니 그걸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법과 법률은 일반적으로 같은 뜻으로 이해되지만 이를 보다 엄격한 관점으로 뜯어보면 그 의미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법과 법률의 차이를 가장 쉽게 설명하기 위한 명제는 다음과 같다. 법(法)은 그 자체로 정당성을 가지는 것이다. 따라서 법은 악법일 수 없다. 법률(法律)은 입법자(사람)가 만든 규범이다. 따라서 법률은 악법일 수 있다. 법은 언제나 정당한 것이지만, 입법자가 만든 법률은 언제나 그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스스로의 죽음을 받아들이면서 남긴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명언으로 받아들이는 분들은 법률과 법의 차이점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처럼 ‘법’과 ‘법률’은 일반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서로 구별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법을 다루는 상황에서는 항상 법률은 단지 법에 일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을 뿐 항상 정의로운 것은 아니므로 그 법이 추구하는 가치, 그 가치가 이 사회의 다른 일반원리와 조응하는가를 끊임없이 살펴야 한다. 특히 노동법과 같은 사회법, 즉 현대사회의 시장만능주의가 배출한 수많은 사회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제정된 법률은 더더욱 그 법률의 제정목적에 부합하는 ‘법적해석’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판결이 과연 노사 간의 합의를 통한 노사관계 안정화를 추구하려는 노조법의 목적에 부합하는 판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 판결이 근거한 또 다른 인식적 틀은 노동조합의 자주성에 관한 심각한 오해에 기반해 있다. 특히 노동조합과 사용자는 역사적·구조적으로 대립관계로서 사용자가 노조전임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것은 물론 노동조합에게 최소수준을 넘는 운영비를 제공하는 것은 자주성 침해 여부를 판단할 것도 없이 부당노동행위로 위법하다는 대목이 백미라 할 수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영국 사회민주주의운동에 중요한 이정표를 남기고, 영국 의 유명한 런던정경대학(LSE)의 설립자였던 시드니 웹(Webb, Sidney)과 그의 아내 베아트리체 웹은 함께 쓴 ‘노동조합주의의 역사’(History of Trade Unionism, 1894)에서 노동조합을 “그들의 고용조건의 증진 또는 유지를 목적으로 하는 임금소득자들의 지속적인 협의체(a trade union is a continuous association of wage earners for the purpose of maintaining or improving the conditions of their employment)”라고 설명했다.

웹 부부의 이런 노동조합에 대한 정의는 노동조합의 단결력을 배경으로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고자 하는 노동조합주의 이념으로 발전했는데, 이후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의 입법적 기초를 제공하는데 많은 역할을 했다. 마찬가지로 1953년 3월8일 제정된 우리나라 최초의 노동조합법 제2조(노동조합의 정의)는 “본법에서 노동조합이라 함은 근로자가 주체가 돼 자주적으로 단결하며 근로조건의 유지·개선, 기타 경제적·사회적 지위향상을 도모하는 조직체 또는 그 연합체를 말한다”라고 규정하는 것과 같이 우리나라의 노동조합에 대한 법적 개념 정립과정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처럼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노동조합은 생래적 성격상 소속 조합원들 간의 결속방식에 더 많은 의미를 갖는 조직이라고 할 것이고, 이러한 노동조합에게 가장 강조되는 미덕은 바로 ‘자주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판결이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노동조합의 자주성은 사용자와의 대립과 갈등을 전제로 사용자로부터 지급되는 모든 금품의 제공을 차단하는 것으로부터 확립되는 것이 아니다. 노동조합은 교섭과 합의를 통해 조합 활동을 더 강화시킬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획득할 수 있고, 그 합의에 따라 금품이 지급되더라도 노동조합이 내부적 민주성과 대외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 자주성은 확보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관계는 지난 수십년간의 경험을 통해 역사적 구조적으로 확인돼온 사실이다. 오히려 노동조합이 사용자로부터 전임자의 임금 등을 지급받는 것이 곧바로 노동조합의 자주성 훼손이라는 단순논리를 내세우면 노동조합은 조합원이 더 많은 조합비를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더 많이 임금을 올리려고 할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 강력하게 투쟁해야 하는 왜곡된 현상을 낳을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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