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태초에 행동이 있었던 게 아니고. 관념론의 순수결정체인 종교경전, 성서에서 말했다. 여기서 태초란 인간이라는 종이 탄생하던 때라고 하자. 이 종은 다른 종과 구별되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말이었다. 행동의 결과를 예측하고 이것을 종 내의 다른 사람과 소통하고 행동한다. 다른 사람의 행동의 결과를 분석하고 이것으로 장차 행동의 결과를 예측한다. 이론은 이런 것이다. 인간이 다른 종으로부터 분리돼 태어나게 한 것이 말·사고체계·이론이다. 그러나 태초에 ‘말씀’이 아니라 ‘말’이 있었다. 말씀은 인간의 말이 아니라 신의 말이다. 스스로 사고해서 말함으로써 인간은 탄생했다. 그 뒤 인간의 역사는 말의 역사였다. 말로 표현되는 사고체계, 이론의 역사였다. 그러니 인간세상의 지배자는 어느 시간, 어느 공간에서건 말의 지배자였다. 그 시공간의 이론의 독점자였다. 지배자가 되고 나서 이론을 독점하기도 하고, 이론을 지배함으로써 현실의 지배자가 되기도 했다. 무엇이든 지배자는 자신의 세상에서 이론을 지배한다.

이 세상에서 이론은 사물에 대한 것과 인간에 대한 것으로 나뉜다. 자연과학이 전자라면 사회과학은 후자다. 이 세상은 사람과 사물의 관계,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두 가지의 관계가 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사람의 노동·역할·지위·신분 등으로 정해지는 관계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협력과 대립, 투쟁이 존재하는 관계다. 노동하는 자와 노동을 빼앗는 자가 존재하는 관계다. 인간은 끊임없이 인간세상에서 관계를 맺고 행동한다. 이것은 이론을 통해 이뤄진다. 그러니 노동자가 사는 이 세상도 이론에 의해 구축됐고 체계화돼 왔다. 이 세상의 지배자는 이 세상이 어떻게 탄생했고 움직이는지 설명해 왔고 지금도 끊임없이 설명하고 있다. 이걸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행동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동자로, 자본가로 살아간다.

인간세상이 양적이든 질적이든 끊임없이 변하고 이론도 끊임없이 변화하게 된다. 만약 이 세상이 노동자에게 부당하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지배자의 이론이 부당한 것이다. 만약 이 세상에서 노동자의 권리가 없거나 빈약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권리의 이론, 법이 노동자를 위해 권리로 보장해 준 것이 없거나 빈약한 것이다. 자신의 의사에 반해 노동자가 사업장에서 추방된다면 이 세상의 국가질서에 관한 권력의 이론체계, 법이 노동자를 추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노동자가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 투쟁한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권리를 선언한 법을 들여다봐야 한다. 국가권력이 작동하는 이론체계인 법이 어떻게 자신의 권리를 보장했는지, 어떻게 자신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았는지, 무엇을 사용자의 것으로 보장했는지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2. 이 세상은 노동자에게는 노동을 빼앗기는 세상이다. 노동하는 자가 자신의 노동을 빼앗기고 노동하지 않는 자는 노동하는 자의 노동을 빼앗아 노동의 결과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것은 노동하지 않는 자가 노동하는 자의 노동을 지배함으로써 이뤄진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사업장에서 상시적으로 작동하는 질서의 법칙이다. 소유권의 질서가 사업장에서 노동의 지배를 통해 노동의 결과를 지배한다. 노동이 아니라 소유가 지배하고 차지한다.

오늘 회사 조직을 살펴보자. 주식회사에서 자본은 주식의 소유만으로 회사의 이사 선임 등 경영권을 지배하고 이익배당 등으로 이익을 차지하고, 회사의 매각·분할·합병·해산과 같은 회사의 운명을 결정한다. 노동자는 이것들에 관한 회사의 지배·소유와 운영의 권리가 없다. 사업을 위해 조직되고 이 사업은 노동자의 노동으로 수행되는 것임에도 노동은 배제된 채 자본의 권리만 있을 뿐이다. 주식의 소유가 주식회사의 모든 권리를 가진다. 회사 경영활동에 대한 대가도 아니고 회사의 소유에 대한 대가로 모든 권리를 가진다. 대표이사 사장도 주식을 소유한 자본이 선임한 자로 그 보수를 받을 뿐이다. 물론 대표이사 사장이 대주주 자신이 직접 맡아하는 경우도 많지만 그렇다고 대표이사 사장이기 때문에 회사의 이익을 배당받게 되는 게 아니다. 노동자는 이런 회사법질서가 부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동하는 자신은 아무런 권리도 없다는 이 법질서가 부당한 것이라고, 그래서 이 법질서는 노동자가 권리를 갖는 것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때는 이 세상의 사업장질서, 회사법체계에 맞서 자신의 권리이론을 주장해야 한다. 이 세상은 권리이론만으로 존속하는 게 아니다. 수많은 이론들로 채워져서 세상은 재생산된다. 결국 지금 세상의 이론들을 무덤에 묻지 않고서 다른 세상은 열리지 않는다. 결국 이론의 무덤이 세상의 무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과거 봉건제의 이론체계를 묻고서야 봉건제 세상을 묻을 수 있었던 저 위대한 인간의 역사, 시민혁명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론의 무덤은 그 이론을 그저 묻겠다는 의지만으로 팔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론은 세상 사물에 관한 인간의 사고체계다. 이것은 새로운 이론으로만 넘어설 수 있다. 세상 사물에 관한 새로운 이해와 체계화를 통해 기존 이론의 무덤을 팔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기존의 질서가 완강하다면 그것은 기존 질서의 이론체계를 무너뜨릴 정도로 새로운 이론체계를 확립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이론체계가 존재하는데, 그것이 기존의 이론체계를 무너뜨릴 체계임에도 아직 사람들의 인식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을 수 있다. 새로운 이론이 타당한 것임에도 지배자의 권력이 기존의 낡은 이론을 지키고 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만큼 새로운 이론체계가 사람들을 설득할 정도의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이론이 사람들을 기존의 이론질서를 전복시키는 정도로 끌어낼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3. 이 세상에서 노동운동은 노동에 반하는 자본의 질서 폐지를 말해 왔다. 그럼에도 자본의 질서는 여전히 세상의 질서이고 오히려 날로 외부적으로, 내부적으로 확장해 나가고 있다. 자본의 지배를 합리화하는 이론체계는 확고할 뿐만 아니라 날마다 새롭게 변신하면서 새로운 영역까지 파고들고 있다. 사업장이든 아니든 그곳이 어디이건 관계없이 이 질서의 이론체계는 그곳의 이론으로 변신하며 합리적인 체계로 세워지고 적용되고 있다. 보다 체계적인 이론은 대학과 연구소에서 생산되고 있다.

노동은 어떻게 이에 대항하는 이론을 세워 가고 있을까. 다른 것은 제외하더라도 노동의 권리를 세우는 권리이론에서 이 세상의 이론에 맞서 어떻게 이론을 세워 가고 있을까. 노동의 이론은 정체돼 있다. 노동의 권리이론은 세워지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 경제가 확대재생산되는 것처럼 자본의 권리이론도 확대생산되고 있는데, 노동의 권리이론은 제대로 생산조차 되지 않고 있다. 노동자의 권리가 박탈된 자본의 독점적 질서를 폐지하라고 노동운동은 외쳐 왔다. 하지만 이를 넘어설 노동자의 권리가 보장된 노동의 이론은 세우지 못했다. 그저 경제이론에 사로잡힌 채 자본주의 경제이론의 비판으로서 정치경제학을 가지고 자본주의의 확대재생산이 고장 나서 작동을 멈출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봉건제의 확대재생산이 작동을 멈춰 자본주의 세상이 열린 것이 아니다. 봉건제에서 노동하는 자가 빼앗기고 지배받는 자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는 게 부당하다고, 봉건의 권리 질서에 맞서는 권리이론들이 등장했다. 그것으로 봉건의 권리이론을 무덤에 묻었다. 봉건의 지배질서에 맞서 노동하는 인간의 권리를 옹호했기 때문에 당시 탄생했던 권리이론은 오늘 노동자가 노동의 권리이론을 세우는 데 있어서도 이론적 근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오히려 지금 자본의 권리이론은 노동하는 자가 아니라 노동하지 않는 자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으로 나가고 있기 때문에 당시의 권리이론에 합치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어찌됐건 세상은 사람의 노동을 통해 세워지고 존속하는 것이다. 노동하는 자가 세상의 소유, 지배와 운영에 관한 권리가 박탈되고 노동하지 않는 자가 노동을 지배하면서 그 권리들을 독점하고 있다면 과거 봉건질서에 맞서 시민계급(부르주아지)의 이데올로그들이 주창했던 권리이론에 의할 때도 올바른 것일 수 없다. 이 올바름을 가지고 노동자는, 노동운동은 노동의 권리이론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노동하는 자의 노동을 빼앗는 자본의 권리이론을 무덤에 파묻고 노동이 빼앗기지 않는 노동의 세상을 열 수 있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인간은 비로소 올바로 말하게 될 것이다. 태초에 노동하는 자의 말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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