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이 가서 또 망치고 오는 것 아냐.” “아, 이런 건 소수가 가야 재미있는데.”
지난 9일 서울시청 앞 광장. 2차 희망의 버스가 떠나기 전 민주노총 소속 연맹 간부들이 서로 농을 던지듯 주고받는 말들이 귓가에 꽂혔다. 뼈 있는 농이 더 유쾌한 듯 웃는 얼굴은 환했다.

쇠고기 촛불집회와 반값 등록금, 희망의 버스로 이어지는 한국 사회와 진보운동의 새로운 변화를 겪으면서 누구나 나름 한 가지씩의 깨달음은 있었을 터. 그 후로도 이어진 농담에서 변화를 갈망하는 그들의 열망과 함께 일말의 두려움도 읽혔다. ‘우리는 시대를 선도하고 있는가. 아니, 시대의 변화라도 뒤쫓아 가고 있는 걸까.’

14일 희망의 버스 기획단이 “더 많은 희망을 담아 이달 30일 부산으로 향하겠다”고 밝혔다. ‘3차가 가능할까, 얼마나 모일까’라는 의문이 따라붙는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오늘날의 조직된 노동자 운동을 일으킨 시발점이었다. 그 원동력은 80년대 초부터 군사정권의 혹독한 탄압에서 신념을 지켰던 지식인들과 현장 노동자들의 자발성과 헌신성이 아니었을까.

2차 희망의 버스를 동행취재하면서 왠지 80년대 냄새(말로만 듣던)가 풍기는 듯했다. 오랜만의 느껴 봤던 최루액(가스)의 따가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구도 구체적으로 지시하지 않았으나 희망의 버스 참가단은 한진중공업으로 향했고, 누구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김진숙’을 불렀고, 정리해고 철폐를 외쳤다. 어찌 보면 뻔한 그 길이지만, 참가자들은 스스로 판단했고 행동했다.

“사람(노동자)들이 너무 모이지 않는다”는 말은 민주노총은 물론 연맹 간부 사이에서는 너무 평범한 말이 되고 말았다. 답을 마련하고 길을 제시하고, 참여할 공간 없이 사람들을 불러놓고는 푸념만 늘어 놨던 것은 아니었는지. ‘자발’ 혹은 ‘자치’라는 단어가 품은 깊은 의미를 잊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는지.

80년대와 다른 것은 분명 있다. 이제 사람들의 관심사가 다양해졌다. 헌신성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다만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에서 재미를 느껴야 한다. 반드시.

초창기 개그콘서트의 재미는 단지 무대 위 개그맨의 행위에만 있지 않았다. 열려진 무대에 개그에 관심 있는 사람이 모였고, 관객이 참여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어렵고 힘들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스스로 할 때, 재미는 있는 법이다.

어찌 보면 뻔한 길. 그러나 언제까지 만들어 놓은 관심사와 해법에 그들을 동원할 것인가. 그들이 관심 있는 공간을 열어 주고 스스로 행동할 수 있도록 길을 마련해 줘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니, 그냥 관심사가 같은 사람끼리 모여 재미있게 놀자. 30일 3차 희망의 버스는 아마 그렇게 출발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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