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와 다름 없는 아침. 법률원 문을 열고 무심코 탁자 위에 놓인 신문을 바라봤는데, 홍대 앞 두리반이 신문 1면을 장식하고 있었다. 기나긴 투쟁 끝에 승리! 기사 한가운데 두리반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잔잔하고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순간 내 입가에서도 배시시 웃음이 흘러나왔다.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사람들이 무슨 좋은 일이 있냐고 물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를 처음 뵌 것은 내가 감히 두리반에 밴드공연을 하러 갔을 때다. 삶의 무료함을 조금 달래볼 요량으로 평소 알고 지내던 자들과 자그마한 밴드를 하고 있다. 드럼을 맡고 있고 있는데, 우리 실력이라고 하는 것이 주로 지인들과 함께 하는 송년회에서 몇 번 공연을 해 본 것이 전부인 터라, 홍대 앞 클럽에서 노래하는 쟁쟁한 팀들이 나온다는 두리반 공연은 처음부터 무리임이 분명했다. 갑작스런 공연 제의에 실력보다는 연대하는 마음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덜컥 하겠다 하고 말았다. 그날 불렀던 곡이 크라잉 넛의 ‘밤이 깊었네’였다. 어떻게 끝까지 공연을 했는지 모른다. 마지막 부분에서 “~흔들리고 있네요”라고 끝나는데, 사회를 보시던 분이 ‘정말 흔들려서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무대’라고 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쉽게 공연한다고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날 정해진 공연들이 모두 끝나고 두리반 아저씨·아주머지와 인사할 기회가 있었다. 우리 중 누군가가 나를 변호사라고 소개하자, "그렇지 않아도 물어볼 게 있다"고 하셨다. 철거 과정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아주머니는 형사재판을 받는 중이셨다. 철거업체가 두리반에 못 들어가도록 막아 놓은 양철담을 떼어낸 것과 강제철거에 항의했던 것들을 손괴죄나 업무방해죄 등으로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재판 과정에서 주의해야 할 사항이나 준비할 것들에 대해 몇 차례 조언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다시 연락이 왔다. 두리반 문제가 합의될 것 같다며 합의안 작성에 대해 상의하고 싶다고 하셨다. 다시 법률원에서 만나 합의에 관련된 이런저런 상의를 했다. 합의서 작성시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이나 표현하는 문구, 누락되면 안 될 사항 등에 대해 상담했다. 철거회사가 보내왔다는 퇴거동의서, 건물철거 동의서 같은 여러 가지 서류가 있었다. 강제철거시 업체에서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서류양식인 듯 싶었는데 동의서에는 철거업체의 권리와 나가는 이의 의무만이 기재돼 있었고, 작성자도 철거당하는 이가 서명날인만 해서 철거업체에 제출하는 형식이었다.

내용뿐 아니라 형식부터가 고압적으로 구성돼 있었다. 법적 효력에는 별 차이가 없었지만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명칭부터 쌍방이 대등한 지위에서 작성하는 ‘합의서’로 하고, 합의 주체인 업체도 서류 작성자로 포함시키고, 내용도 쌍방의 권리의무를 정하는 형태로 수정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아저씨는 "맞다. 그렇게 해야 되겠다"며 더없이 좋아하셨다. 돈을 더 받고 덜 받고, 그런 것보다 끝까지 당당하게 요구할 것은 요구하고 안 되는 것은 안 된다고 할 것이라고도 했다. 문구를 그렇게 하나 안 하나 효력에는 별 차이가 없다고 설명했지만, 아저씨는 그날 있었던 상담내용 중 합의서의 형식과 표현방식에서부터 업체와 개인이 동등하게 작성돼야 한다는 게 가장 큰 소득이라며 환하게 웃으셨다. 그로부터 며칠 후 신문 1면에서 두리반 투쟁 승리라는 문구를 봤을 때 어찌 아니 기쁠 수 있겠는가.

사실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고 지켜 내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감수하는 것도 임금 얼마 더 받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응당 받아야 할 노동자의 권리를 당당하게 요구하고, 그렇게 해서 노동의 가치가 정당하게 존중받을 때 진정 노동자로 사는 것이 떳떳할 것이기 때문이다. 며칠 전 부산으로 가는 희망버스를 기다리다 아저씨를 다시 만났다. 합의한 기일이 지나자 철거업체는 바로 두리반 건물을 허물어 버렸고, 아직 두리반을 옮길 만한 상가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합의금만으로 근처에 두리반을 열수 있는 상가를 구할 수 없어 여러 가지 방안을 찾고 있다고 했다. 조만간 홍대 앞에서 두리반 간판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면 다시 두리반에서 아저씨·아주머니의 환한 미소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집들이 공연 제의가 오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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