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은 갈 길이 멀다고 느끼면서도 요즘 부쩍 지나온 4년을 돌아보게 된다. 아마도 얼마 전 있었던 삼성반도체 백혈병 행정소송 1심 판결 결과 때문이리라. 지난 6월23일 서울행정법원 행정14부(재판장 진창수)는 삼성반도체 백혈병 사망 첫 산재인정 판결을 내렸다. 엄밀히 말하면 5명의 원고 중 2명만 산재로 인정됐으나, 대부분의 언론사들은 '산재인정'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춰 대대적인 보도를 했다.

피해자들과 함께 산재인정을 위해 동고동락해 온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반올림) 활동가 중 한 명으로서 그동안 삼성의 온갖 회유와 방해, 근로복지공단의 불승인 처분, 노동부의 냉대를 무릅쓰고 굳건히 버텨 온 피해자들 모두가 산재인정이 한꺼번에 되지 않은 것은 억울한 일이다. 또 모두 비슷한 유해환경에서 일해 왔는데, 법원이 선별적으로 판단한 부분도 매우 억울했다. 하지만 단 2명이라도 산재가 인정됐다는 것에 대해 언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주목했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이렇다. “골리앗 삼성을 무너뜨렸군요”. “깨끗하다고 호도된 반도체 공장의 유해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4년 동안 애썼는데 드디어 희망을 보는군요. 더 힘 받아서 2심은 완승!”

승소의 주인공은 고 황유미씨(사망 당시 23세)의 아버지 황상기씨다. 이분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지금처럼 삼성에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을 내고 반도체 공장의 유해성이 세상에 드러나는 일은 매우 더뎠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이분과의 첫 만남은 이렇게 큰일이 있을 때마다 떠오른다. 당시에는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상상하기 힘들었지만.

속초에서 택시운전을 한다는 황상기 어르신을 처음 만난 건 2007년 7월이었다. 이미 어르신은 억울하게 죽은 딸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던 때라, 처음 대면한 우리들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준비해 온 사람처럼 분명한 눈빛으로 한마디 한마디 힘주어 이야기를 했다.

“내 딸이 걸린 백혈병은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취급한 화학물질로 인한 산업재해가 분명합니다. 왜냐면 함께 일한 2인1조 세척작업자였던 이숙영씨도 백혈병에 걸려 죽었고 내 딸도 백혈병에 걸려 죽었는데, 백혈병이 감기처럼 흔한 전염병도 아니고 이게 산재가 아니면 무엇이 산재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삼성은 개인 질병이라고 오리발만 내밉니다. 내가 병원에서 딸 병간호할 때 보니까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에 걸린 사람이) 2명만 있는 게 아니고 한 여섯 명쯤 있습니다. 삼성에는 노동자를 보호해 줄 만한 노동조합도 없고 삼성관리자들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합니다.”

이후 2007년 11월 대책위(현재의 반올림)가 발족했고, 2011년 현재 반올림에 들어온 피해제보 즉 삼성전자 반도체·LCD·삼성전기 등 첨단 전자산업현장에서 일하다 백혈병·뇌종양·재생불량성빈혈·흑색종(피부암)·다발성경화증·루게릭 등 여러 희소질환 피해제보가 130여건에 달한다. 이 중 47명은 이미 숨졌다. 거의 대부분이 젊은 20~30대 노동자들이다. 이 중 우리가 산재신청을 함께하고 있는 노동자는 이제 20명째다.

도대체 이 싸움이 언제 끝날지는 장담하지 못한다. 현행 산재보험법령의 매우 협소한 재해 인정기준의 문제가 있고, 반노동자적인 운영으로 절망만 주는 근로복지공단과 고용노동부도 문제다. 법원 역시 ‘증거주의’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로 인해 많은 희소질환 피해자들의 눈물과 고통을 모두 닦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빠르게 변모하는 첨단 전자제품의 변화 속도만큼 생산현장의 모습도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단지 산재인정에만 그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일터에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위험을 알리는 적신호다.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하기 위한 필요 최소한의 조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노동자들이 잠재적 위험을 ‘인지’해야 하고 또 위험한 현장을 통제할 집단적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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