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제일은행 서울 서초지점에서 일하는 이종문(46)씨는 지난 27일 출근을 하지 않았다. 대신 같은 은행에 다니는 부인 조정희(42)씨와 일곱 살 난 딸 지민이의 손을 잡고 여의도로 향했다. 세 식구는 금융노조 SC제일은행지부에서 마련한 전세버스에 올랐다. 강원도 속초에 있는 한 콘도로 갔다. 세 식구들의 ‘파업 여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지민이네 식구의 ‘파업여행’

이날 밤, 아빠와 함께 파업전야제에 나온 지민이는 무대 위에서 팔뚝질하는 아저씨가 신기한 듯 마냥 쳐다봤다. 이씨는 유치원에 다니는 지민이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파업에 참가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파업. 장모에게 부담을 주기 보다는 파업현장으로 가족여행을 가기로 결정했다.
“낯선 곳에서 지민이가 아플까 봐 걱정도 됩니다. 그래도 오랜 만에 아이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잖아요?”

지부가 파업에 들어간다고 하자 이씨의 상사가 영업점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업무에 차질이 예상되니, 돌아가면서 파업에 참가해 달라고 했다. 이씨는 단번에 거절했다.
“전면파업인데 돌아가면서 할 수는 없잖아요. 저는 이번 파업에 올인하기로 했어요.”

그는 “은행이 도입하려는 개별성과급제 도입에 반대한다”고 잘라 말했다. 과거 외환위기 당시, 은행 노동자들이 대규모로 길거리로 내몰릴 때 부부사원은 구조조정의 주요 대상이었다. 사내커플로 부인 조씨를 만나 결혼까지 한 이씨는 그때 생각이 났던 모양이다.
“은행은 개별성과급제를 도입해도 고용안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건 연막전술에 불과해요. 나중에 엄청난 구조조정이 뒤따를 겁니다. 반드시 막아야지요.”



본사의 지침, 위협 느끼는 노동자들

“이거 봐 이거. 보여? 이게 파업이야.”
파업전야제 대열 맨 끝에서 한 여성 조합원은 무대 쪽으로 등을 돌린 채, 연신 스마트폰을 바라보며 말했다. 집에 있는 열 살 난 아이, 친정 어머니와 화상통화를 하고 있었다. 대구에서 올라왔다는 이 조합원은 “식구들이 파업이 뭔지 궁금해해서 보여 주고 있다”고 말했다. 친정 어머니는 “잘됐으면 좋겠다”고 딸을 응원해 줬다고 한다.

“지금 아이는 기말고사 기간이거든요. 옆에서 챙겨 줘야 하는데 속상해 죽겠어요.”
그는 “집에 있고 싶었지만, 개별성과급제가 워낙 우리의 생존하고 직결된 문제라서 여기 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SC제일은행이 추진하려는 개별성과급제에 대해 조합원들은 대부분 ‘생존권’과 연결시켰다. 실제 개별성과급제가 도입되면 업무성과가 떨어지는 직원들은 임금이 동결된다. 더 불안한 것은 재택근무를 발령받아 임금이 최대 45%까지 삭감된 뒤 퇴출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은행은 그동안 지점별로 실시한 성과급제를 개인별로, 지점장급에게만 적용했던 퇴출성제도인 ‘후선발령’을 전 직원으로 확대하려고 한다. 개별성과급제는 국내 어느 은행, 어느 기업에서도 실시하지 않는 제도다.

영국 런던에 본사를 두고 있는 SC제일은행의 대주주 스탠다드차타드 은행그룹(SCB)은 최근 리처드 힐 은행장을 런던으로 불렀다. SCB는 “개별성과급제를 반드시 시행하고, 노조에 밀리지 말라”는 지침을 내린 것으로 알려졌다. “성과주의가 도입돼야 하는데 한국의 은행만 호봉제를 실시하고 있다”고 다그친 것으로 전해졌다.

“돈 빌릴 때만 고객인가요?”

그렇다면 SCB의 주장대로 은행업무를 성과 점수로 표현할 수 있을까. 전야제에서 만난 김아무개(33)씨는 고개를 저었다.
“개별성과급제요? 임금이나 고용과 직결된 거는 맞아요. 그런데 그게 다는 아니거든요.”
은행은 대출이나 신규 저축상품 가입 등 이른바 ‘돈 되는 일’만 하는 게 아니다. 잔돈 교환과 예금 인출 등 서비스업무가 기본이다.

그런데 성과를 인정받으려면 신규대출이나 대규모 저축상품을 유치해야 한다. 반면에 이자상환·연체상담·대금지급 등의 업무는 성과로 인정받지 못한다.
“사전업무만 성과로 인정하고 사후관리를 성과로 인정하지 않으면 누가 이 일을 하겠어요? VIP 고객만 고객이고, 생활형 저축 가입자들은 고객이 아닌가요? 돈을 빌리는 사람만 고객이고, 돈을 갚는 사람은 고객이 아닌가요?”

김씨는 자신이 상담창구를 비우는 바람에 발걸음을 돌려야 하는 고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했다. 하지만 “파업이 과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죄송하지요. 한 번 발걸음을 돌린 고객을 다시 돌려 세우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고 있어요. 지금 우리가 하는 행동이 서민 고객들에게 돌아갈 피해를 줄이는 거라고 생각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하루빨리 끝났으면”

2시간에 걸친 파업전야제가 끝났다. 조합원들은 숙소로 흩어졌다. 최유나(33) 조합원은 “파업을 하고 있다는 게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장기화되는 것은 생각도 하기 싫어요. 노사협상이 잘돼서 하루빨리 끝났으면 좋겠어요.”

다음날인 28일 오전 김문호 금융노조 위원장과 리처드 힐 SC제일은행장이 서울 공평동 은행 본점에서 만났다.“개별성과급제 도입을 철회하라”는 김 위원장의 요구에 힐 행장은 “성과연봉제는 조직의 성과를 향상시키고 조합원을 보호하는 제도”라고 맞섰다.

힐 행장은 “파업이 길어지면 조합원의 고용안정이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는 협박성 발언도 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면담은 결론 없이 한 시간 만에 끝났다. 적어도 이번주까지는 노사협상이 진행되기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지민이네 가족의 파업여행도 금방 끝날 것 같지는 않다.

“SCB자본, 한국 우습게 보고 고금리상품 판매”
“한국을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와 같은 후진국으로 보고 고금리상품을 쏟아 냈어요. 처음부터 한국을 우습게 본 거지요.”
지난 27일 저녁 금융노조 SC제일은행지부 파업전야제에서 만난 조합원 조제성(42)씨는 은행측의 사업방식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만큼 SCB는 한국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지부가 전면파업에 들어가자 SCB자본의 한국철수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SC제일은행은 잇단 부동산 매각과 고액배당·영업점 폐쇄에 이어 최근에는 우리금융 인수에 실패한 산은금융의 ‘다음 타깃’으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지난해 당기순이익이 25%나 줄어드는 등 SCB는 인도와 동남아에서의 성공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SCB가 한국시장에서 실패한 것은 다른 시중은행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대출금리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예컨대 SC제일은행이 취급하고 있는 중소기업 분할 상환대출의 경우 이자율이 17~30%에 이르는 고금리다. 우리나라에서 중소기업 대출을 가장 많이 한다는 기업은행의 이자율(5~6%)과 비교하면 ‘고리대금업’ 수준이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후진국에서 고금리상품을 통해 이익을 보자, 이를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조합원 조씨는 “그런 고금리상품을 팔라고 직원들에게 강요하고, 그것으로 성과등급을 매기겠다는 게 SCB 자본”이라고 비판했다. 김학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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