뿔난 금융노동자들에게 진짜 뿔이 달렸다. 신입직원 임금삭감에, 갈수록 커져만 가는 노동강도, 정리해고의 쓰라린 기억을 되살리는 메가뱅크(초대형은행). 거기에 성과연봉제다 개별성과급제 등 언제 잘릴지 모르는 퇴출성제도까지…. 그래서 모였는데 진짜로 ‘뿔’을 달고 모였다.

금융노조가 금융노동자 총진군대회를 개최한 지난 22일 저녁 서울시청 광장. 광장을 가득 메운 3만여명의 머리에 모두 뿔이 달렸다. 금융노동자들이 얼마나 뿔이 났는지 보여 주려고 빨간불이 번쩍번쩍하는 뿔을 달았다. 쏟아지는 장맛비에 우의가 거추장스러웠지만, 빨간뿔들은 음악소리에 맞춰 신나게 춤을 췄다. 수십 년을 은행원으로 살아온 선배들이나, 기껏해야 1년도 일하지 않은 후배들이나 자신들이 얼마나 뿔이 났는지, 왜 뿔이 났는지 보여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메가뱅크 구조조정 걱정에 “11년 만에 거리로”

은행생활을 30년 했다는 금융노조 기업은행지부 조합원 김대원(55)씨. 그는 11년 만에 거리로 나왔다고 했다. 외환위기 이후 대규모 구조조정에 반발해 금융노조가 총파업을 벌였던 2000년 7월을 기억하고 있었다.

“옛날 생각이 많이 나요. IMF 때 퇴출당한 사람들은 지금도 다들 어렵게 살고 있어요. 앞으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다 같이 힘을 모아서 막아야 해요.”
지금 금융노동자들에게 퇴출 위협으로 다가오는 것은 정부가 추진하는 메가뱅크다. 은행과 은행이 합쳐치면 얼마나 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나앉게 되는지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2001년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의 합병이 그랬다. 두 은행이 합쳐진 KB국민은행은 다른 은행과 합병하지 않았는데도 지난해 3천200명을 명예퇴직시켰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우리은행과 합쳐질지 모른다는 흉흉한 소문이 금융권에 나돌고 있다.

KB국민은행 조합원 배강식(44)씨는 "메가뱅크를 막으려고 집회에 나왔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반대하고 있어요. 덩치가 커지면 자산규모는 늘어나겠지요. 하지만 노동자들이 안정적으로 일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불안하기만 합니다.”

우리은행 노동자들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지주회사인 우리금융 재매각이 주춤한 상태이지만 언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처음에는 산업은행과 합쳐질 것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다른 은행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다. 그것도 우리은행 점포(900여개)와 370여개나 겹친다는 KB국민은행이 유력하다고 한다. 중복되는 점포수만큼 노동자들이 무더기로 잘리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우리은행지부 조합원 김아무개(29)씨는 “전문가들도 메가뱅크는 성과를 내지 못할거라 하고, 우리은행이나 다른 은행도 스스로 수익을 잘 내고 있는데 왜 굳이 합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했다.



신입사원들 “우리만큼 뿔난 사람 있나요?”

뿔이 났다면 늦게 입사했다는 이유로 임금을 깎인 신입사원들 만큼 뿔난 사람들이 있을까. 정부는 2009년 2월 공공기관에 “신입사원 임금을 삭감하라”고 강요나 다름없는 권고를 했다. 공공기관부터 시작된 임금삭감은 KB국민은행이나 신한은행 등 시중은행에 빠르게 퍼져 나갔다. 아직도 정부는 권고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 그러면서 신입사원과 선배사원의 임금차이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지난해 8월 입사해 임금 20%를 삭감당한 신한은행지부 조합원 박기환(27)씨는 “억울하다”고 했다.

“제가 20%만큼 일을 덜 하는 것도 아니에요. 선배들도 초임삭감에 관심을 갖고 있지만 우리들만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노사가 협상을 해서 잘 해결됐으면 좋겠어요.”
지난해 외환은행에 입사했다는 안기호(28)씨는 아예 무대에 올라 억울함을 호소했다. 안씨는 “여기 오신 야당 대표님과 국회의원님들께서 신입직원 임금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 달라”고 강조했다.

“급여를 삭감해 더 많은 일자리가 생기고, 청년실업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청년실업률은 더 올랐답니다. 박탈감만 커졌어요.”
이날 대회에 참석한 김진표 민주당 원내대표·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입사시기가 늦다는 이유로 임금격차가 계속 벌어진다면 노사관계가 더욱 악화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어 "문제해결을 위해 금융노동자들과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고된 싸움' 나선 금융노동자들

외환은행 노동자들은 올해 가장 힘든 길을 걸어온 금융노동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해 11월 대주주인 론스타가 하나금융에 은행을 팔기로 계약한 뒤, 이를 막으려고 7개월 동안 싸웠다. 론스타의 대주주 자격 문제가 잇따라 불거지면서 정부는 매각승인을 유보했다. 론스타와 하나금융이 계약기간을 연장하려고 하지만 어쨌든 외환은행 노동자들이 원했던 목표에 한걸음 다가선 셈이다.

여기까지 오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회에 참석한 김병국(34) 외환은행지부 조합원은 “회사 일과 투쟁을 병행하는 것이 힘들었다”고 털어놨다.
“론스타의 먹튀를 막기 위해 싸웠는데, 처음 몇 달 동안은 언론이나 국민들의 관심이 없어서 소외감을 느꼈어요. 그런데 지금은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투기자본인 론스타가 '먹튀'를 하도록 국민들이 가만 있지 않을 겁니다.”

외환은행 노동자들이 상반기에 싸움을 주도했다면, 이제는 SC제일은행 노동자들의 차례다. 성과등급에 따라 임금인상률 자체를 달리 적용하겠다는 회사의 개별성과급제에 반발해 SC제일은행지부는 27일부터 무기한 전면파업에 들어간다. 하위등급을 두 번 이상 받으면 후선업무로 밀려나 임금이 45%까지 삭감당할 수 있는 후선역제도 확대도 노동자들을 위협하고 있다.

지부 조합원 김아무개(33)씨는 “같은 파이에서 나누는 것이지 더 주겠다는 것 아니다”며 “(성과를 쌓기 힘든) 입출금 등 기본적인 서비스업무는 서로 안 하려고 할 것이고 고객에게 피해가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지부가 파업에 돌입하면 장기화할 가능성이 크다. 2004년 씨티은행과의 합병에 반발했던 한미은행지부의 파업 이후 7년 만에 은행 장기파업이 예상된다.

“동료들이 생각보다 많이 왔어요. 오늘 집회를 계기로 개별성과급제를 막기 위해 함께 싸웠으면 좋겠습니다. 나중에 고객들에게는 양질의 서비스로 보답해야지요.”
이아무개(41)씨는 대회가 끝나자 “27일 파업에 꼭 참여할 것”이라며 서울시청 광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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