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역 주한미군으로부터 왜관 캠프캐럴에 고엽제를 묻었다는 증언이 나온 지 한 달이 지났지만 고엽제를 불법적으로 매립했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다이옥신 오염을 확인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토양 시료채취는 전혀 이뤄지지 않은 채, 미국은 레이더 및 지하수 조사를 동원해 시간만 끌고 있다. ‘우리는 미군 때문에 먹고산다’던 왜관 주민들이 ‘땅만 파보면 될 것을 왜 이러냐’며 미군에 대한 불신을 숨기지 않고 있다. 미군이 설명회까지 개최하며 대화에 나섰지만, 믿지 못하겠다는 분위기가 대세다.
이 같은 상황은 미군 내에서도 예견된 것이었다. 주한미군으로 근무했던 오시바 대위가 97년 미공군대학원에 제출한 논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주한미군 부대 곳곳에 유해화학물질이 매립돼 있으며, 토양과 지하수의 오염이 심각하다. 아직까지는 한국정부의 환경규제가 미약하고, 미군에게 책임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지 않다. 애매한 소파 규정에 대한 문제제기도 없다. 하지만 이 상황은 변하게 될 것이다. 언젠가 한국의 사회경제적 수준이 향상돼 환경의 가치가 높아진다면, 미군은 오염에 대한 정화 및 보상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될 것이다.”

불행하게도 오시바 대위의 지적은 주한미군의 환경정책에 반영되지 않은 듯하다. 이번 사건에서 미군은 초동대응을 빨리하는 척했지만, 레이더 조사 등으로 시간 끌기에 나섰다. 주민들의 분노가 심각하지 않으면 얼렁뚱땅 마무리하겠다는 계산이 훤히 보인다. 하지만 왜관지역 주민들은 지역 자체조사에 나서야 한다며 더 적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중이다. 주민들의 완강한 자세가 계속된다면 미군은 제대로 된 조사에 나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 나아가 이번 일을 계기로 미군의 의식이 전환되기를 바란다. 미군은 ‘한국에 주둔해 주는 것만으로도 한국정부와 한국인들이 미군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우월의식을 버려야 한다. 또 한국에 반환할 기지들을 깨끗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도덕적 책임도 깨달아야 한다.

필자는 왜관의 상황을 지켜보며 삼성을 떠올렸다. 삼성이 노동자와 그 가족들을 상대하는 태도가 미군이 한국을 보는 낡은 태도와 흡사해 보였기 때문이다. 삼성은 한국경제를 이끄는 기업이라는 우월의식에 사로잡혀, 노동자와 그 가족들에게 삼성에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고마워할 것을 강요해 왔다. 노조라는 기본적 권리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치밀한 노무관리와 내부 경쟁문화를 조성했다. 견디지 못한 노동자들이 자살을 하거나 화학물질로 인한 백혈병으로 고통을 당할 때도 삼성은 어느 것 하나 인정하지 않았다.

사실 삼성에서 발생된 백혈병은 삼성만의 책임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화학물질 관리체계가 허술한 탓에 제조업에서 사용하는 세척제가 벤젠에 오염돼 유통됐다. 전자업종뿐 아니라 자동차업종에서도 이러한 제품은 유통됐고 자동차공장 노동자들에게서도 이미 백혈병은 발생했다. 이 같은 문제를 인정하고 대응했다면, 삼성은 백혈병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산재를 인정받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좋은 기업이라는 이미지도 구축했을 것이다. 그러나 삼성은 ‘스스로 무결점하다’고 주장해 버렸다. 벤젠이 함유된 세척제를 사용했을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과거에 세척제를 사용할 때 벤젠 함량을 분석해 확인한 후 사용한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이러한 태도는 삼성의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는다.

미군과 삼성의 태도는 상대방을 깔보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미군이 한국을 낮게 보고 있듯 삼성도 노동자를 우습게보고 있다. 하지만 미군은 왜관지역을 비롯한 한국인들의 저항에 직면해 곤욕을 치르고 있고, 어쩔 수 없이 태도를 전환하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삼성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비록 지금은 삼성에 저항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소수인 것처럼 보이지만, 언젠가는 삼성의 모든 노동자들과 가족들, 삼성의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삼성에 등을 돌리는 날이 오지 않을까. 삼성이 지금의 낡은 태도를 고수하면 할수록 추해지는 것은 삼성이며, 삼성이 치러야 할 곤욕만 더 커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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