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부정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와 정반대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민주공화국·민주정의당·세계화 등이 그런 것들이다. 이런 구호는 때로는 목표를 분명히 하고 시민들을 한곳으로 모으는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정치를 위한 구호로 악용된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신뢰는 곤두박질치고 그 반작용을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노동정책에서도 같은 경험을 했다.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로드맵·선진화 등으로 포장된 노동정책을 쏟아냈다. 대부분 제대로 실현된 정책은 없다고 해도 좋다. 오히려 거짓말이 지나쳐 정부 기반을 흔들어 놓기도 했다. 96년 노동법날치기 통과는 정부를 바꿔 놓았고, 기간제법 시행 2년을 맞던 2009년 7월 즈음 비정규직 해고대란설을 유포한 장관은 교체됐다.

개발시대와 달리 ‘선진국’의 문턱에 이르렀다고 자평하면서도 구호를 앞세우는 정책이 줄 잇는 모습에 안타까움이 크다. 그 원인을 나름 ‘선진화’와 ‘노동정책(노동부의 존재이유)’에 대한 몰이해에서 찾아봤다. 요컨대 노동자를 위한 노동정책을 시행하고 노사 자율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노동정책(노동부)의 최우선 목표는 노동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개별적 근로관계에서는 노동자의 피해를 예방하고 구제하며 집단적 노사관계에서는 우월한 사용자에 맞서 노조의 부족한 힘을 보완해 줘야 한다. 노동자는 보호할 사회적 약자라는 성원들의 공감이 노동정책의 뿌리가 아니겠는가. 70년대까지 우리 사회엔 이런 공감이 없었다. 노동자는 보호의 대상이 아니었다. 개발논리하에서 사용자 우선 정책을 당연시했던 것이다. 80년대 정의롭지 않은 정부에서조차 노동부가 만들어진 것은 포장 논리만은 아니다. 노동자보호가 그만큼 절실하다는 시대정신이 반영된 결과다.

그런데 최근 노동정책(노동부)은 마치 그 소명을 다한 듯한 느낌이다. 노동자 권리가 완전히 보장받고 사용자와의 대등한 지위를 넘어 노조는 아예 우월한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회에 도달한 것으로 착각할 정도다. 일자리 나누기, 오전 8시 출근 오후 5시 퇴근, 여가 즐기기, 소비 신장하기 등 정부는 선진국 수준의 노동정책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동의하는 현장 노동자는 거의 없지 않을까. 최저임금도 받지 못하는 노동자, 야간교대 근무 종사 노동자, 연장·휴일 근무 노동자, 산전·후 휴가는 엄두도 못내는 노동자들이 훨씬 많지 않는가.

문제는 노동부(노동정책)가 이들을 정책 중심에 두지 않는 데 있다. 본연의 제1 책무임에도 말이다. 최소한의 법집행과 감독도 다하지 않는 것이 오늘 노동부의 모습이다. 일상적인 체불임금과 최저임금 위반도 감시하지 못하는 지경이다. 기초 책무도 잊어버린 채 국가경제를 걱정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그렇게도 걱정되는 경제발전(소비)은 체불임금과 최저임금만 지켜져도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이다. 더구나 이에 대한 관심은 노동부 몫도 아니다. 바로 경제발전 계획을 수립하고 책임져야 할 부서가 중심이 돼야 할 것이다.

보통 선진화의 대척점으로 규제와 통제를 떠올리게 된다. 누가 말하지 않더라도 질서가 지켜지는 사회가 선진국 판단의 주요 요소일 것이다. 경제발전과 어우러져 우리도 국가의 통제와 처벌을 일삼던 시대를 벗어나 바야흐로 구성원 각자의 자율이 존중받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그러나 노동정책은 정반대 양상으로 가고 있다. 규제와 통제가 심해지고 있다. 선진화라는 이름으로 공공기관 종사 노동자들의 임금체계를 임의로 바꾸고 초임자들의 연봉을 삭감하는가 하면 노사가 자율적으로 체결한 단체협약을 송두리째 바꾸려 한다. 이미 전임자임금과 복수노조 운영에 관해 지난 13여년간 노사자율로 형성한 규범도 유예된 법 시행이라며 밀어붙이고 있다. 법원에도 인정한 기득권은 아예 보호범위에 들지도 않는다. 초기업별 단위의 교섭권이나 협상으로 얻은 편의제공 등이 그러한 예다. 선진화는 사회적 약자로부터 인정받는 사적 합의를 국가가 보호해 주는 데서 출발돼야 한다.

이명박 정부는 ‘선진국’ 진입에 목말라 있다. 후대에 그렇게 평가받고 싶은 모양이다. 하지만 노동정책은 안타깝게도 개발도상국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희한한 것은 '믿는 기업'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하는 노동정책이다. 다행히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그리고 그 방법을 알고 있는 자들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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