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즘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내가 바보가 아닐까. 이 세상의 행진이 자꾸만 이상해 보이고 나는 그 행진을 그저 쫓아가지 않으니 그러는 내가 바보가 아닐까. 자꾸 이 세상의 질서가 이상해 보이니. 그런데 이 세상은 별 탈 없이 유지되고 있으니 그걸 이상하게 보는 내가 바보인 게 분명한 거 같고. 자본과 권력의 질서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에 맞서는 노동자투쟁에 대해서도 그렇다. 온통 이상해 보인다.
이 세상의 법질서, 자본의 질서는 자본주의세상의 질서로서 국가법질서로 세워졌다. 봉건의 질서를 폐지하고 자유·평등을 기치로 자본의 질서가 세상의 법질서가 됐다. 이 세상의 법질서에서는 봉건사회의 봉건적 소유제는 노동하는 자의 권리를 배제하는 절대적인 소유권으로 전환됐다. 출생에 의해 취득되는 봉건신분제는 부르주아 시민계급처럼 계약에 의해 권리와 의무가 확보되는 신분제로 신분제의 이름이 폐기된 채 대체됐다. 하지만 그건 소유의 존부와 크기에 의해 철저히 사용자와 노동자로 계약됐고 출생에 의해 취득됐지만 일부 상승이 가능했던 시대의 봉건신분제보다도 한 개인에게는 절대적으로 노동자일 수밖에 없는 조건에서 체결됐다. 그럼에도 계약에 의해 취득된 것이므로 더 이상 신분제도가 아니라고 했다. 봉건제를 지탱시키던 관습의 힘은 법의 힘으로 변경됐다. 그리고 이 모든 봉건질서를 지탱시켰던 봉건권력을 시민의 혁명과 전쟁으로 괴멸시키고 국민주권주의, 법치주의의 시민권력이 근대헌법질서로 절대적인 권력으로 됐다. 그 권력의 힘은 감히 봉건권력이 쫓아올 수 없다. 이 모든 게 자유·평등의 이름으로 절대적인 것으로 됐다. 봉건제 아래에서 봉건권력의 허가를 받아 사업하고 납세해야 했던 상인·공장주 등 부르주아 시민계급에게는 분명 이 세상의 질서는 자유이고 평등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유와 평등을 노래하며 이 세상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장하는 사상 최고의 질서라고 선언했다.

2. 그런데 이상하다. 봉건소유권에는 노동하는 자에게도 조금의 권리가 있었다. 경작하는 농민에게는 농지에 대한 일부 권리가 있었다. 그와 그의 조상이 노동으로 일구고 가꿔 왔던 농지였으므로 그가 경작하고 그 생산물의 일부를 차지하는 건 당연한 권리였다. 그런데 이걸 빼앗겼다. 영국의 인클로저운동, 식민지조선의 토지조사사업 등 나라마다 시대마다 제각각의 이름으로 불렸지만 노동하는 농민은 이걸 빼앗겼다. 이 세상의 법질서에서는 노동하는 농민의 권리를 부정하고서 소유권은 절대적인 게 됐다. 일부 나라에선 시민혁명에서 농민은 부르주아 시민계급의 편을 들어 봉건소유자로부터 몰수받은 농지를 분배받기도 했다. 프랑스시민혁명의 농민이 그랬다. 그리고 그걸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라고 다른 나라들에서도 쫓았다. 물론 그때도 분배받은 소유권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과거 농민들이 가지고 있던 농지에 대한 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강제든 몰락이든 농지에서 쫓겨난 자들은 자본의 소유가 절대적으로 인정되는 공장에 들어갔다. 자본이 만든 노동계약은 오로지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너에게 너와 네 가족이 생존할 수 있도록 임금을 지급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계약으로 정할 사항이 아니었다. 그건 절대적으로 자본가의 것이었기 때문에 노동자와 체결한 근로계약서에 없었다. 공장의 소유도, 생산물의 소유도, 공장과 생산물의 처분도, 나아가 공장에서 노동자의 추방도 모두 자본가의 것이고 권한이었다. 이렇게 이 세상의 권리는 노동하는 자의 권리를 추방하고 세워져 있었다.

3. 이 세상에서 자본에 맞서 노동자투쟁은 전개됐다. 근로계약관계에서 노동자의 몫을 더 내놓으라고 임금 등 근로조건를 위해 투쟁했다. 그러다 자본의 폐지까지 나아가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자본과 노동의 노동관계는 그대로 두고 그 재생산의 구조에서 임금 등 조건을 더 달라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 노동자투쟁은 전개됐고, 그 투쟁의 권리가 노동기본권으로 확보됐다. 따라서 그걸 요구하는 건 정당한 교섭의 대상이고, 그걸 관철하기 위한 파업은 정당한 목적의 쟁의행위로 됐다. 이렇게 노동자투쟁이 이 세상의 법질서로 됐다. 그렇다고 자본의 폐지까지 나아간 노동자투쟁의 요구가 교섭의 대상이나 쟁의의 목적으로 정당한 것이라고 인정되지는 않았다. 그건 이 세상의 질서 자체였으므로, 그건 이 세상의 본질적인 질서였으므로 노동자투쟁으로도 절대 침범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에 맞서 노동자투쟁은 자본과 노동의 노동관계에서 공장의 소유를 자본으로부터 빼앗아 국가의 것으로 돌리기도 했다. 이제 자본 대신 국가가 노동관계에 들어앉았다. 국가권력과 노동의 노동관계 질서가 사회주의 노동관계로 새로운 노동관계 질서로 세워졌다. 그걸 노동자세상이라고 했고, 그래서 그 세상에서 노동자투쟁은 노동자세상의 반역이었다. 그러나 노동자는 여전히 같은 공장에서 똑같이 노동을 했다. 그게 그의 생존수단이었으므로. 다만 자본이 아닌 국가의 계획과 지시에 따라 노동한다는 게 달랐다.

4. 어찌된 것일까.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노동자투쟁은 자본과 노동의 노동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한 것이었는가. 소유권의 개념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어떻게 확보했던 것일까. 이 세상의 질서 내에서 전개된 노동운동이든, 아니면 그걸 넘어서 전개된 노동운동이든 어떠한 것도 이 세상의 노동관계와 소유권개념을 근본적으로 재구성하지 못했다. 어떠한 거라도 노동자의 권리는 그곳에 없었다. 노동자 소유 없는 임금의 쟁취였거나, 소유 없는 자본의 폐지였을 뿐이었다. 자본주의세상의 법질서에서 자본가는 공장 등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자의 권리로 노동자에게 의무를 이행하도록 함으로써 노동자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니 생산수단의 자본가 소유를 폐지하는 게 계급의 폐지고 착취의 근절이라고 봤다. 그래서 노동운동가는 그걸 주창했다. 생산수단의 사적소유를 폐지하라. 그러면 계급은 폐지되고 노동착취는 사라진다. 그러나 그곳에 노동자의 권리는 여전히 없었다. 노동하는 자가 소유하고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 그건 사적소유의 폐지로 금지됐다. 사적소유의 폐지는 노동자의 생산수단에 대한 소유권도 권리도 폐지해 버렸다. 노동자 권리의 폐지가 노동자세상이라고 불렸다. 노동운동의 비극은 이렇게 나타났다. 자본과 노동의 노동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노동자권리로 소유권개념을 변경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 이 세상에서 노동자투쟁은 근본적인 것이 될 수 없었다. 근본적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이 세상의 질서에서 세울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어떠한 거라도 지금까지 전개된 노동운동은 모두 근대시민혁명으로 탄생시킨 노동관계와 소유권, 권리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걸 이어 가고 있었다. 단지 계약의 조건이나 계약의 상대방을 문제 삼아 기존의 조건이나 상대방을 극복하겠다고 발버둥쳐 왔던 게 아닐까. 이상하다.

5. 오늘 이 나라에서 노동운동은 어떤가. 노동자 소유 없는 임금의 쟁취를 위해서 전개된다. 혹은 일부에선 노동자 소유 없는 자본의 폐지를 말하고 있다. 지난 200년간 노동운동이 전개된 대로 그렇게. 그러니 앞으로 이 나라 노동운동이 어떻게 될 것인지 그 결과는 뻔하다. 이미 그러한 노동운동의 결과는 세계 노동운동사로 낱낱이 새겨졌다. 그 역사에는 곳곳에서 여전히 노동자는 그게 불만이라고 노동자의 권리는 보장되지 못했다고 노동자세상은 아니라고 외쳐 댔다. 그러니 이 나라에서 그게 노동자의 꿈이라고 노동의 미래라고 말해도 그걸 믿고 작업장을 박차고 나와 노동자가 투쟁하지를 않는다. 그런데도 그걸 학습하고 학습한 대로 실천한다고 선동하고 선전해 댄다. 모두가 그러니 이상하다. 그 선동과 선전에 노동자가 떨쳐 일어나 투쟁한다면 그건 이 나라 노동자에게 승리 아닌 실패를 보여 주게 될 것이다. 그러니 바보가 되더라도 나는 말할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욕망을 권리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자유·평등을 노동운동이 말한다면 그건 노동자의 욕망이 자유·평등을 갈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권리의 언어로 노동운동은 표현해야 한다. 무엇이라도 노동자의 권리를 외면한다면 그건 노동자투쟁의 대상이 되고 말 것이다. 아무리 고상하고 거창한 가치라고 내세우는 무엇을 위해서라도 노동하는 자의 욕망, 그것의 법적 언어인 노동자권리를 억누르고 폐지한다면 그땐 노동자권리를 억누르고 폐지시킨 질서는 노동자에 의해 폐지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 자본과 노동의 노동관계를 재구성해야 한다. 단지 자본의 자리를 무엇으로 대체한다고 노동자의 욕망이 멈출 수 없다. 그리고 노동자의 권리로 소유권개념을 새롭게 해야 한다. 노동자의 권리가 추방된 소유권에 노동자는 저항할 수밖에 없다. 노동하는 자가 자신이 생산해 낸 세상에 대한 권리와 소유를 가져야 한다. 무슨 주의는 이것을 위해서만 의미를 갖는다. 오직 이것으로만 그 주의가 거짓인지 아닌지 판단될 것이다. 공유제니 어쩌니 하는 소유형태의 문제는 이것 다음의 문제다. 그건 이것이 확보된 뒤 노동자의 필요와 선택에 의해서 스스로 결정할 문제여야 한다. 이것이 오늘 나의 바보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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