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을 넘기고 지난 7일 운명한 전 고려대 총장 김준엽은 살아온 세월만큼 이력도 다양하다. 85년 3월 놀러 간 고려대에서 난데없이 목격한 첫 교내시위는 이상했다. 총장을 돌려 달라는 시위는 그 이후론 한 번도 못 봤다. ‘총장 사퇴하라’는 시위에 익숙한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매우 이질적이었다. 총장 재직 3년 내내 시위학생을 징계하라는 전두환 정권의 압력에도 버텼던 총장. 끝내 전두환 정권은 학생을 내쫓는 대신 총장을 내쫓았다.

74년 박정희 정권의 통일원 장관 제의를 거절한 배후엔 부인이 있었다. 백범의 비서실장이던 민필호의 딸 민영주는 45년 초 경성 침투작전을 준비하던 중국 서안의 광복군 주둔지에서 이범석과 장준하가 지켜보는 가운데 김준엽과 결혼했다.

부인 민영주가 74년 남편에게 온 정권의 제의를 단칼에 자르지 않았던들 김준엽의 이름 뒤엔 제2공화국의 주일대사·3공의 공화당 사무총장·4공의 통일원 장관·5공의 국무총리·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 때 다시 국무총리란 직함이 붙었을 것이다. 그렇게 김준엽은 용케도 이승만·장면 친일정권과 박정희·전두환 군사정권의 집요한 입각제의를 거절한 거의 유일한 자유민주주의자다.

자나 깨나 재벌 편들기만 바쁜 경제신문 지면도 가끔 예외는 있다. 매일경제신문이 9일자 1면에 큼직하게 단독보도한 은 속이 시원했다. 대기업이 복사용지 등 소모성 자재구매 대행(MRO)시장에 뛰어들어 중소기업 밥그릇을 송두리째 뺏아 국민의 공분을 사고 있다.

삼성은 국민정서에 밀려 한발 물러나 계열사 외엔 MRO 사업 추가진출을 자제하겠다고 했지만 LG서브원은 뜻을 굽히지 않아 비난의 초점이다. 이 와중에 입만 열었다 하면 공정사회를 외치는 MB정부의 최대 공공기관인 한국전력과 산하의 발전자회사들이 LG서브원으로 MRO 거래처를 바꿨다. 김쌍수 한전 사장은 바로 그 LG그룹의 부회장 출신이다.

한전은 공기업의 ‘삼성’이다. MB정권은 2008년 공기업 인사 때 자기처럼 사원으로 입사해 그룹 부회장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인 LG의 김쌍수를 한전 사장으로 뽑았다. 공기업도 민간기업처럼 경쟁과 효율을 실천하라는 신호탄이었다.

한전과 4개 발전자회사가 LG서브원을 통해 구매한 물량이 연간 190억원에 달한단다. 한국수자원공사와 한국철도공사 등 상당수 공공기관도 중소기업과 거래를 끊고 LG서브원·아이마켓코리아 등 대기업 MRO 업체들과 일제히 거래한단다.

공기업이 앞 다퉈 중소기업의 밥그릇을 걷어차는 사이 행정안전부는 공공기관의 모든 소모품을 중소기업과 거래하자고 정부부처에 요구했다. 조달청은 대기업 MRO의 조달시장 독주를 막기 위해 중소기업 독자 컨소시엄에 가산점을 주는 방안을 추진하고, 공정위는 대기업의 위법을 조사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참 가지가지 한다.

한전의 김쌍수 사장은 노무현 정부 초기 대통령과 장·차관 토론회에 초청강사로 나오는 등 노무현 정권과도 인연이 깊다. 노무현 대통령 해외순방 때마다 경제팀에 합류해 동행했다. 노무현 정부가 기르고, 이명박 정부가 열매 맺은 제2의 김쌍수는 수없이 많다. 4대강 공사 때 숨진 노동자 사망사고가 “대부분 본인 실수”였다는 막장발언으로 유명한 정종환 전 국토해양부 장관도 노무현 정부에서 철도시설공단 이사장을 지냈다. 비리 저축은행에 촉수를 대고 서민들의 푼돈을 빨아먹은 금감원 등 3대 금융 감독기관의 비리 인사들도 노무현 이명박 정부를 관통하며 출세 가도를 달려왔다.

저축은행 비리를 놓고 보수신문들이 DJ와 노무현 정부 때 부실을 키운 게 화근이라고 집중보도하자, 한겨레신문은 지난달 28일 3면에 <검찰, ‘옛 여권’인줄 알았는데... 캐다 보니 ‘현 여권’?>이라고 어깃장을 놨다. 희망과 전망을 착각한 해설기사는 제목에 박힌 큼직한 ‘물음표’에 전적으로 기댄다. 아무리 덮어도 저축은행 부실은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정부의 ‘합작품’이다. 우리에겐 김준엽만한 언론도, 기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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