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보습은 땅을 가는 사람의 도구다. 칼은 사람을 베는 무기다. 보습은 노동의 도구고 칼은 권력의 도구다. 노동하는 자는 보습을 사용했고, 노동하는 자를 지배하는 권력자는 칼을 사용했다. 하지만 노동하는 자도 투쟁하기 위해서는 보습을 버리고 칼을 들어야 했다. 그러나 그때도 칼은 권력의 노래일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는 투쟁한다. 끊임없이…. 투쟁했고 투쟁하고 있다. 지금도 야간노동 철폐를 주장하며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비닐하우스에서 투쟁하고 있다. 정리해고 철회를 주장하며 한진중공업 노동자들과 김진숙 지도위원은 투쟁하고 있다. 불법파견 철폐를 주장하며 현대자동차 비정규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다. 그리고 발레오·대우자판·SC제일은행 등 많은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이 투쟁하고 있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노동자들은 투쟁하고 있다. 그런데 도대체 뭔가. 노동자의 투쟁이라는 게 도대체 뭐기에 노동자는 계속 투쟁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서 노동자는 투쟁을 위해 보습, 즉 작업도구를 내려놓고 칼을 들었던 것인데 어찌하여 노동자는 수시로 계속해서 칼의 노래를 하는 것일까.

2. 이 세상이 열리면서 노동자투쟁도 시작됐다. 사실 이 세상을 열 때도 노동자는 자본이 주장하는 질서에 맞서 투쟁했다. 당시에는 보습이 아닌 칼들이 노래하던 시기였다. 칼의 노래에 의해 이 세상의 질서가 세워졌다. 그리고 노동자는 패배했다. 이렇게 노동자의 투쟁은 이 세상의 시작부터 함께했다. 처음 노동자투쟁은 불법이고 범죄라고 이 세상의 법질서는 선언했다. 투쟁 자체가 불법이고 범죄라고 법은 규정했다. 르샤플리에법·단결금지법·주종법·공모법 등 이 세상의 민·형사법은 노동자투쟁을 적대했다. 노동자의 칼은 불법무기였다. 그런데 불법이고 범죄였지만 노동자투쟁은 전개됐다. 노동자투쟁은 계속됐고 이제 불법과 범죄는 빈번하게 대규모로 전개됐다. 그러니 더 이상 이 세상의 법질서는 노동자투쟁을 불법과 범죄로 선언할 수가 없었다. 노동자투쟁을 이 세상의 법질서가 적대하면 그것은 이 세상의 노동자들이 이 세상의 법질서를 적대할 것이었다. 노동자투쟁이 광범위한 노동자대중에 의해 전개됐으므로 이 세상의 법질서는 그들을 적대하면 자신을 적대하도록 해서 노동자투쟁에 의해 자신이 폐지될 수 있었다. 이제 이 세상의 법질서는 노동자투쟁이 범죄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더 이상 국가는 파업 자체를 범죄로 처벌하지 않았다. 단순히 노무제공을 거부하는 파업은 불법이라 해도 협박죄, 업무방해죄로 처벌되지 않았다. 그리고 노동자투쟁이 원칙적으로 불법이 아니라고 규정했다. 더 이상 국가는 파업을 무조건 불법으로 인정해서 손해배상·가압류 등 사용자의 청구를 받아 주지 않았다. 이 법질서가 100년을 이어 왔다. 노동기본권의 역사였다. 그러나 모든 나라에서 이 법질서가 확립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나라에서는 이 법질서가 세워지기 전에 노동자투쟁이 자신을 적대하는 국가법질서를 폐지하기도 했다. 100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일부 노동자들은 선진 나라의 법질서를 쳐다보며 노동기본권 쟁취를 위해 투쟁하고 있다. 지금 이 나라도 헌법은 노동자의 기본권으로 노동기본권을 보장했지만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 등 법률은 노동기본권 행사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투쟁은 범죄와 불법으로 제한되고 금지된 채 노동자는 노동기본권 행사 보장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3. 그런데 노동자는 이 세상이 시작된 이후 지금까지 무엇을 투쟁한 것인가. 노동자는 투쟁해서 투쟁을 권리로 쟁취했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것을 노동기본권으로 보장받았다. 아직도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한다. 그런 건가. 노동자투쟁은 기껏해야 이 세상에서 그 투쟁이 범죄가 아니고 원칙적으로 불법이 아니라는 걸 쟁취하기 위해 지금까지 전개해 왔던 것인가.
그렇다. 이 세상의 질서가 세워지고 지금까지 노동자투쟁은 여기에 머물렀다. 그런데 그것은 이 세상에서 노동자투쟁에 대한 법적 평가일 뿐이다. 투쟁이 범죄냐 아니냐, 합법이냐 불법이냐. 국가가 노동자투쟁에 책임을 묻고 사용자가 책임을 부과할 수 있도록 할 것이냐 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욕망이 이 세상의 권리로서 법질서로 확보된 것은 아니었다.
이 세상의 법질서는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자본의 지배에 노동이 복종하도록 규정했다. 세상의 사물에 관한 자본의 권리를 소유권이라고 했다. 세상 사람에 관한 자본의 자유를 계약자유라고 했다. 세상에 관한 권리가 박탈된 자는 노동자가 됐다. 그는 자본과 노동계약을 체결해서, 자본에 복종해서 노동을 제공해야 했다. 자본의 작업장에서는 노동은 자본의 것으로 빼앗겼고 노동자의 것이 아니었다. 자본의 명령이 작업장질서였다. 작업장에서는 자본은 주인이고 노동은 노예가 됐다. 세상의 법질서는 노예제 등 신분제도를 폐지했다고 선언했지만 작업장에선 노동계약에 의해 그 선언이 배제됐다. 이론은 노예와 노동자를 구별해 줬다. 작업장은 자본의 지시에 복종해 노동을 제공해야 한다는 노동계약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노동자의 노동은 자본의 것이었으므로 그 생산물은 자본의 것으로 귀속됐다.
그 노동계약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욕망을 권리로 확보하겠다고 투쟁했다. 투쟁하기 위한 권리를 확보하겠다고 투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노동자투쟁은 어찌된 일인지 이 세상에서 노동과 자본의 관계를 새롭게 설정해서 노동자의 욕망을 권리로 이 세상의 법질서로 확보한 것이 아니라 투쟁이 노동자의 권리라고 노동기본권을 보장받았다. 노동자도 칼의 노래를 할 수 있다고 보장받았다. 노동자의 투쟁의 칼로 노동자의 욕망을 세상의 질서로 쟁취한 것이 아니라.

4. 이 세상이 시작되고 노동운동은 한때 자본을 폐지한 적이 있었지만 노동의 질서를 세우는 데 실패했다. 노동운동은 이 세상의 질서에서 임금·근로시간·작업조건·차별금지 등을 욕망으로 내세워 투쟁해 왔다. 자본의 폐지냐, 이 세상의 질서에서 자본에 복종하는 노예의 욕망이냐. 아직도 그 사이에서 노동자투쟁은 전개되고, 전자가 실패한 지금 후자로 몰입해 가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에서 야간노동 철폐투쟁, 정리해고 철회투쟁이 전개되고 있다. 야간노동 없이 자본의 작업장에서 노동을 제공하겠다는 투쟁이고, 해고 없이 자본의 지시에 복종하며 노동을 제공하겠다는 투쟁이다. 어디에도 자본의 폐지를 위한 노동자의 욕망은 없다. 거기서 반자본주의구호는 엉뚱할 수밖에 없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의 재구성을 위한 노동자의 욕망은 없다. 이것이 지금 이 나라 노동자투쟁의 현실이고 실체다. 노동자투쟁에서 아무리 거창한 구호를 외쳐 대고 커다란 의미를 부여한다고 해도 이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노동자투쟁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노동계약이 존재하고 그 속에서 노동자는 욕망하고 그걸 권리로 확보하기 위해 투쟁하기 때문에 노동자는 계속해서 투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노동자가 투쟁할 권리를 노동기본권으로 보장한 것이다. 노동자는 그래서 이렇게 칼의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5. 그래서 이미 노동자들은 모두 투쟁하고 있으되 이런 칼의 노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나 이 나라에서 노동자투쟁에선 합법이냐 불법이냐가 논란이 되고 노동자와 노조는 투쟁이 합법이라고 주장하기에 바쁘다. 합법적인 칼의 노래는 보장했으므로. 이렇게 주장하다 노동자투쟁에서 요구의 정당성은 사라지고 칼의 정당성만 남게 된다. 그리고 칼이 정당하지 않다는 권력의 비난이 노동자투쟁에 가해지면 노동자투쟁은 막을 내리고 만다. 그러나 노동자가 자본과의 관계를 재설정하고자 한다면, 이 세상에 노동의 질서를 세우고자 한다면 그건 보습으로 가는 땅의 노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노동은 자유의 노래를 할 수 있다. 자본과 노동의 관계·노동계약·작업장질서, 소유권과 노동의 생산물의 귀속 등에 관해 노동자의 욕망을 이 세상의 법질서로 쟁취해야 한다. 노동자가 욕망하는 만큼 노동의 질서를 세울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자본에 빵을 더 내놓으라고 투쟁하는 것으로는 쟁취될 수 없다. 자본의 질서에 도전해서 노동의 자유를 내놓으라고 요구하고 투쟁해야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 칼의 질서를 걷어 내고 보습의 질서, 노동의 질서를 세울 수 있다. 결국 노동자의 욕망이 보습과 칼의 전쟁의 승패를 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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