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판단에 있어 해묵은 과제가 하나가 있는데 바로 ‘타당성’이라 하겠다. 법적판단에서 타당성이란 "분쟁이 생긴 현실관계에서 법의 해석과 그 적용의 대상이 되는 일에 가장 합당한 해결을 줄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 부분을 일반적으로 ‘구체적 타당성’이라고 하기도 한다.

노동분쟁의 실제에서는 바로 이 ‘구체적 타당성’이라고 하는 부분이 굉장히 어렵다. 기업 사무실 현장·강단·차량 운송현장·상품 제조공장·상품 판매매장 등에서는 각기 다른 업무가 이뤄지는 만큼 다른 노동관행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개별 해고사건은 ‘사회통념상 고용계약을 계속할 수 없을 정도로 근로자에게 책임 있는 사유가 있는 경우’를 기준으로 그 정당성을 판단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사업장마다 특색이 있는 만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노동현실에 따라 그 판단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점이 내가 이해하고 있는 ‘구체적 타당성’의 본 모습이다. 노동위원회가 준사법기관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한 법적 판단에 있어 ‘구체적 타당성’에 관한 배려 깊은 이해는 최소한의 덕목이라 하겠다.

노동위원회 심판위원회를 구성하는 건 분명 인간이다. 인간이다 보니 살아왔던 환경·교양, 현재의 직업 등에 따라 가치관이 다를 수 있다. 논문으로 자기의 생각을 말하고, 교양수준도 높으며, 손에 기름때를 묻혀 본 적도 없고, 퇴근 후 술 한잔에 하루를 위로받는 일상을 보내지 않는 사람은 욕설을 섞어 일상적으로 대화하고, 상급자의 명령에 폭언으로 답하고, 동료 간 폭행·협박 등이 빈번히 일어나는 공간에 대해 어색할 수 있다. 분명 그럴 수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런 어색한 공간에서 일어나는 분쟁에 대해 나라면 듣기도 싫을 것 같다. 그런데 결국 판단은 해야 한다. 어쩌겠나.

학자가 학자사회에서 벌어진 분쟁에 대해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색하지 않을 수 있다(물론 이 경우에도 이공계열과 인문계열 또는 다른 분류로 인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학자가 월급쟁이 사무직 노동자·판매직 노동자·서비스 노동자·공장 생산직 노동자 사회의 분쟁 등에 대해 판단할 때는 자신이 밟고 있는 토양 밖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노동위원회 심판위원회에 언론학과 교수·심리학과 교수·산업공학과 교수·경영학과 교수 등이 포함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를 따지려는 건 분명 아니다. 판단자를 누구로 내세울 것이냐는 우연적이거나 정책의 소산일 뿐 당위는 없기 때문이다. 생산직 노동자도 얼마든지 판단자가 될 수 있다. 다만 생산직 노동자가 타인들의 분쟁을 판단할 때도 자신이 밟고 있는 토양에서 한 발짝 벗어나 타인들의 토양 위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구체적 타당성’이 결여되고, 구체적 타당성이 결여되면 그 판단에 대한 수용도는 분명 낮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히 해고사건은 노동자에게 곧바로 생계의 단절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야말로 ‘구체적 타당성’에 관한 배려 깊은 이해 위에서 판단이 이뤄져야 한다. 노동위원회 패소사건 분석(2001. 1. 1~2005. 4. 30, 도재형, 11면)을 보면 5년간의 전체 해고사건 120건 중 징계해고 사건이 68건이었고, 그중 41건이 모두 ‘재량권 범위 차이’ 즉 ‘해고에 이르기까지는 과한’ 징계처분이라는 이유로 노동위 판정이 취소된 바 있다.

노동위원회 제도상의 문제점에 대해서는 별론으로 하더라도 타인의 토양 위에서 고민하는 노동위원회가 되지 않는다면 노동자에게 노동위원회는 단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와 같은 횡포가 될 수도 있다. 침대보다 다리가 길다고, 다리를 자를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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