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노동연구원 소속 연구위원이 아니라 개인 ○○○의 견해를 참고삼아 말씀드릴 수는 있어요. 만약 기사를 작성할 때 제 소속이나 직책은 물론 내용도 언급하지 말아 주세요. 언제 계고장이 날아들지 모릅니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노동현안과 관련해 노동연구원의 A박사에게 기자가 질문하자 돌아온 답변이다. A박사는 해당 분야에서 유력한 전문가로 통하지만 그의 견해는 기사에 인용할 수 없었다.

#2. 올해 초 B기관은 노동연구원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고용노동부의 정책연구용역 입찰을 준비하다 곤욕을 치렀다. 당초 고용노동부 해당 실무자는 "노동연구원과 공동으로 해도 별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언질을 줬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B기관은 준비했던 입찰서류를 폐기하고 부랴부랴 다른 기관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입찰에 성공할 수 있었다.

노동연구원 파행사태가 올해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 고성과작업장혁신센터·노동패널 사업 이관 등으로 손발이 잘렸고, 대외활동 사전승인제로 입까지 닫혀 버렸다. 그럼에도 노동부는 정책연구 사업을 노동연구원에 맡길 생각이 없어 보인다.

29일 이미경 민주당 의원이 노동부로부터 제출받은 ‘정책연구용역 입찰 결과(1차)’에 따르면 노동부는 올해 57건의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그중 노동연구원에 맡겨진 것은 고작 2건이다. 노동연구원은 18건의 연구과제에 입찰했지만, ‘직업능력개발훈련사업 평가 개편방안’과 ‘택시운전근로자 최저임금 산입범위 개정에 따른 적용실태 및 효과 분석’ 연구만 따냈다. 지난해 단 한 건도 수주하지 못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택시 최저임금 관련 연구의 경우 임금산정 범위를 놓고 대립하고 있는 노사가 ‘연구결과의 신뢰성’을 이유로, 연구자(배규식 연구위원)를 강력히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노사의 요구에 떠밀려 노동부가 불가피(?)하게 노동연구원을 선택한 셈이다.

올해 노동연구원의 예산을 보면 수탁용역사업 수입으로 10억원가량이 책정돼 있다. 2009년 수탁용역사업으로만 80억원을 벌어들인 것과 비교하면 8분의 1 수준이지만 이마저도 채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난달 현재 노동연구원에 맡겨진 정부정책연구 용역이 6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채필 노동부장관 후보자는 지난 26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인사청문회에서 “법률과 정책연구용역 심사기준에 따라 공정하게 선정했다”고 항변했다. 노동연구원이 능력이 안 돼 심사에서 탈락했다는 의미다. 물론 믿는 사람은 없다. 12년간 노동연구원에서 수행해 온 노동패널사업만 하더라도 지난해 한국고용정보원으로 이관됐지만, 넘어간 것은 사업과 예산뿐이었다. 고용정보원은 노동패널을 위한 인력을 새로 배치하지 않고, 기존에 노동연구원에서 이 사업에 참여해 왔던 연구원들을 데려다 썼다.

노동부가 북 치고, 국무총리실 장구 치고

노동연구원은 지난달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23개 국책연구기관을 대상을 실시한 2010년도 경영평가에서 ‘매우 미흡’ 판정을 받았다. 국정기여도가 낮았던 것이 주요 원인이다. 노동부가 국정기여를 못하도록 해 놓고, 국무총리실이 정부정책에 기여하지 못했다며 회초리를 든 꼴이다.

평가 결과에 따르면 노동연구원의 보고서는 전반적으로 시의성 있고, 가독성도 높다는 평가다. 일부는 종합보고서 형식으로 학술적 기여도가 높다는 평을 들었다. 그 결과 가장 배점이 높은 ‘연구결과의 우수성’ 항목(300점)에서 우수 등급을 받았다.

그런데 다음으로 배점이 높은 국가정책기여도(200점)에서 ‘미흡’ 판정을 받았다. ‘국가정책 집행 과정의 기여도’ 항목은 아예 ‘해당사항 없음’으로 처리됐다. 평가단은 “노동연구원의 내부진통과 관련부처와의 갈등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정책네트워크가 단절돼 정책기여도 평가가 이뤄지기 어려웠다”고 밝혔다. 연구결과가 입법화나 시행령·시행규칙의 제·개정에 반영된 실적 혹은 각종 위원회 안건으로 반영된 실적이 저조하다는 지적도 나왔다.

연구사업 관리 분야에서는 노동부에 수시연구과제 수요조사를 의뢰하고도 답변을 받지 못해 정부요청을 연구과제 선정에 반영하지 못한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됐다. 특히 경영관리 분야에서 최하위 점수를 받았다. 평가단은 “수차례 걸친 노사협의회에서 연봉제나 계약제 합의문을 도출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인정하면서 “누적식 연봉제나 재계약 거부요건 등을 더욱 강화하라”고 주문했다.

3년 연속 경영평가 꼴찌, 정부 출연금 끊기나

노동부로부터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노동연구원이 경영평가에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둔 것은 충분히 예상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올해로 3년째 최하위 등급을 받았다는 점이다. 자칫 노동연구원 폐지수순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당장 다음달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국무총리실에 내년 예산안을 제출하는데, 노동연구원의 경우 정부출연금의 대폭적인 삭감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노동부가 지난해부터 고용보험기금에서 지원하는 예산(2009년 88억6천만원 수준)을 끊어 버린 상황에서 내년에 연구원의 가장 큰 수익인 정부출연금마저 중단될 경우 노동연구원이 설 자리는 사라진다.

멀고도 험한 신뢰회복의 길

당초 사태의 발단은 박기성 전 원장과 공공연구노조와의 노사갈등이었다. 국책연구기관으로는 최초로 단체협약을 해지하고, 직장폐쇄를 단행하면서 노동연구원은 이명박 정부의 공공기관노조 길들이기의 시범케이스가 됐다. 이후 노사 간 갈등은 박 전 원장이 자진사퇴하고, 노조 역시 후퇴한 단체협약에 사인하면서 일단락됐다. 그런데도 정상화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올해 3월 말 박 전 원장 퇴임 이후 1년3개월간 연구원을 대표했던 김주섭 원장직무대행이 돌연 보직을 사퇴했다. 김 전 대행은 지난해 96명의 직원 중 11명에 대한 희망퇴직을 실시하고, 대외활동 사전승인제를 도입하는 등 연구원 정상화를 위한 드라이브를 걸어 왔다. 상급기관인 국무총리실 경제·인문사회연구회가 신임원장 선임 등 노동연구원 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연봉계약제 실시와 고용계약서 체결 △정원보다 많은 인원 등 편법적인 경영의 정상화 △국책연구기관으로서의 신뢰회복을 요구한 데 따른 것이다.

하지만 정부의 태도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김 전 직무대행은 ‘사퇴의 변’을 통해 ‘자정노력의 진정성’과 ‘책임성 부재’가 정부의 신뢰회복을 가로막고 있는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그가 스스로 물러난 이유이기도 하다.

새로 선임된 이장원 원장직무대행이 강도 높은 경영효율화 방안을 추진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그는 취임하면서 인사고과에서 2년 연속 최하위 평가를 받으면 해고(임용거부)할 수 있는 ‘2진 아웃제’를 추진하고 있다. 또 원장직무대행 결제 없이는 언론 인터뷰·토론회·국회 자문활동 등을 일체 못하도록 한 대외활동 사전승인제를 엄격하게 적용하고 있다. 현재 이를 어긴 직원에게 ‘계고장’을 보내고 있는데, 징계절차의 사전단계다. 이 같은 노력에도 노동연구원에 대한 정부의 시선은 여전히 싸늘하다.

2년이 넘도록 질기게 이어지고 있는 ‘노동연구원 죽이기’의 노림수는 무엇일까. 국책연구기관으로서 상대적으로 진보적 목소리를 냈던 노동연구원을 해체하거나 다른 연구기관에 통폐합하는 것일까. 아니면 노동연구원의 명맥은 유지하되 이른바 ‘좌파 박사’로 불리는 연구자들을 대폭 물갈이 하는 것일까. 노동연구원 사태가 터졌을 무렵부터 제기된 2가지 시나리오는 지금도 유효한 듯하다.

뉴라이트 원장 지시 거부한 좌파박사
2009년 국민의례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한국노동연구원에서 해고됐던 박사급 연구원이 다음달부터 다시 출근한다. 지난달 대법원에서 부당해고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해고됐던 연구원은 미국 남가주대 출신 경제학 박사로, 박기성 전 원장으로부터 산재보험이 노동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연구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를 거부했다. 이미 '경기변동과 기술혁신이 노동공급과 수요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과제를 채택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고사유에 경영설명회 등 행사에서 국민의례를 거부했다는 이유도 포함됐는데, 재판부는 "공무원이 아닌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이 국민의례를 거부했다고 해 이를 해고의 이유로 삼을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박 전 원장은 뉴라이트 지식인 시국선언에도 동참한 대표적인 보수지식인이다. 그는 2008년 원장으로 취임하면서 “노동연구원이 지난 10년간 좌파의 해방구 역할을 했다”는 말을 남겨 파문을 일으켰다.  김미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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