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재보선의 최대 접전지는 성남 분당을이었다. 사람들은 성남을 남한 최대 ‘부자동네’라 부른다. 그러나 20년 전 성남은 부자동네가 아니었다.

성남시의 역사는 곧 한국 도시빈민의 역사다. 성남시는 71년 8월10일 ‘광주 대단지 사건’으로 드러났듯이 ‘서울의 인구 분산정책’으로 생긴 위성도시다. 철거민들은 '8·10 투쟁'으로 부른다. 68년까지 성남의 원주민 인구는 2천600명이었다. 농업인구가 90% 이상이었다. 당시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성남출장소로 불렸다. 73년 시로 승격했다.

정부는 66년 서울 인구의 3분의 1이 무허가 건물에 사는 현실을 타개하려고 철거민 50만명을 수용·정착시킬 대규모 택지개발이 필요해 성남출장소의 10평방킬로미터를 선정했다. 69년 5월 이주철거민 48세대 154명이 트럭에 실려 왔다. 박정희 정권은 무모한 ‘선입주 후건설’ 이주계획을 단행했다. 끌려온 이주민들에게 임시로 천막을 배정했다. 70년 봄엔 전염병까지 돌아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광주 단지 4박5일>, 월간중앙, 1971.10)

담당 공무원과 결탁해 부정 추첨으로 좋은 분양지를 차지하거나 부동산업자의 농간이 늘었다. 철거민 중 3분의 1이 택지 분양증을 전매하고 서울로 되돌아갔다. 70년 7월 ‘전매금지 조치’를 발표하자 엄청난 파문이 일어 8·10 사태가 일어났다. 8월10일 오전 10시 빗속에서 3만여명의 주민이 모여 시장 면담을 기다렸으나 이유 없이 지연됐고, 주민들이 마침내 광주 대단지 개발사업소에 난입하는 등 폭력충돌로 번졌다. 주민들은 ‘100원에 매수한 땅 만원에 폭리 말라’고 외쳤다. 소방차와 기동경찰대가 동원됐다.

그해 11월12일 주동자 21명이 구속되면서 사태가 일단락됐다. 85년 성남시는 인구 44만7천839명으로 인구 9위의 도시가 됐다. 68년 2만5천700명이었던 인구는 20배 가까이 늘었다. 10%도 안 되는 원주민에 철거이주민이 절반이 넘었다.

80년대 중반 여전히 성남 주민 상당수가 경제활동을 서울에 의존하고 있었지만, 수도권 재배치 정책에 힘입어 제조업 노동자만 5만명 이상인 전국 9위의 공업도시로 성장했다. 이번 선거의 격전지 성남 분당구 바로 옆 중원구가 초기 성남의 주무대였다. 그래서 성남시청은 지금도 중원구에 있다.

성남 상대원 1·3동은 2·3공단이 위치해 전자 섬유업종의 여성 노동자가 많았다. 상대원 2동은 중하층 영세민 주거지였다. 신흥2동은 2공단으로 대영상사나 삼영전자 같은 고용원수 1천명 이상 기업이 12개 있었다.

태평동은 인구가 가장 많고 시청과 중앙시장이 있어 신시가지였다. 단대동은 주택 밀집지로 영세한 가내업이 많았다. 은행동과 창곡동은 빈민지역으로 속칭 ‘달나라’로 불렸다.
80년대 중반 공단의 도시였던 성남시는 생산직 노동자만도 전체 인구의 20%을 차지해 서울 구로와 인천에 이어 전국에서 3번째로 큰 공단도시였다. 당시엔 주택 보급률도 49.7%에 불과해 은행동·모란동·창곡동 등에 불량주택 소유주까지 포함하면 60~65%가 도시빈민이었다.
 
성남시는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집결지였다. 지역의 자립적 경제구조가 부재해 서울과의 종속관계 속에서 상당량의 부가 서울로 유출됐다. 80년대 노동운동이 활발하던 시기, 성남지역 공단 노동운동을 분석한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기사연)의 조사연구보고서 ‘성남지역실태와 노동운동’은 에스콰이아와 라이프제화·협진화섬·광성고무 등 성남공단 내 입주회사 노동자들의 투쟁을 기록하고 있다. 86년 6월에 나온 이 책의 머리말을 썼던 당시 기사연 원장이던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25년이 지난 27일 성남 재보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성남의 부동산 붐은 91년 수서 택지개발 비리사건을 계기로 현재의 현대형 도시로 탈바꿈해 철거이주민들이 세워 이름 높았던 모란시장과 공단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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