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타주의자들 천지다. 교수·노동운동가·노조 간부·기자 그들의 직업은 다르다. 하지만 그들의 말은 방송·신문 그리고 각종 인터넷매체를 타고 이 세상을 도배하고 있다.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를 위하여, 국민과 민족을 위하여, 세상을 위하여. 바야흐로 이타주의자의 상투어 ‘위하여’의 세상이다. ‘위하여’주의자들의 세상이다. 어디서든 이 세상에선 이타주의자들의 말만 들린다. 시끄러워 죽겠다. 위하여, 위하여, ‘머시기’를 위해. 이 세상은 이타주의자들의 세상이다.

2. 지난주 현대자동차지부의 자녀채용 ‘특혜’요구안에 비난이 쏟아졌다. 노조 이기주의라고 비난했다. 이타주의자들은 제 세상을 만났다. 자본의 대변자로부터 노동의 대변자에 이르기까지 그 비난은 차이가 없었다. 일간지 ‘왜냐면’에 기고한 글을 읽고 처음에는 노조활동가 이계안이 기고한 글인 줄 알았다. 어디 소속인가 하고 기고자 이름을 살펴보았더니 현대자동차 전(前) 사장 이계안이었다. 자녀채용 ‘특혜’요구안을 언론사 중 제일 먼저 보도해 비판한 것은 진보언론이었고, 그 언론사들에 제보한 것은 노조활동가였다. 노조이기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는 진보고 보수고 하나였다. 청년실업·비정규직·사회적 약자·공공이익 등을 내세워 비판했다. 이 요구안 때문에 수많은 노조활동가, 노조간부가 분통을 터트렸다. 대기업정규직노조는 갈 데까지 갔다고, 더 이상 그들은 노동운동의 주체가 아니라고, 심지어는 그들은 노동운동의 대상으로 전락했다고 했다. 그렇게 이 나라에서 1주일이 흘러갔다.

그리고 오늘 서울지하철노조가 27일부터 민주노총 탈퇴와 제3노총 가입 찬반투표를 실시한다고 보도됐다. 현대중공업노조·현대미포조선노조·케이티(KT)노조 등이 가칭 ‘국민노총’을 출범해 자본에 대립·투쟁하는 것에서 벗어나 국민을 섬기는 새로운 노동운동을 할 것이라고 밝혔다. 내거는 것만 보면 국민을 섬기고 대화와 상생의 노조운동이므로 그야말로 조합원과 노조가 아닌 국민과 나라경제를 우선하는 이타주의 노조임이 명백하다. 이 나라에서 국민을 섬기는 것보다 더한 공공이익이 있는가. 이들이 내세우는 것이 그대로 지켜진다면 이들은 조합원의 임금 복지도 지금의 절반 이하를 감수하고서라도 국민을 섬길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 이제 현대자동차지부 요구안을 비난한 이타주의자들은 모두 국민노총에 주목해야 마땅하다. 지금 추진자들은 국민노총을 통해 국민을 섬기겠다고 천명한 것 외에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리 국민노총이 어떠할 것이라고 그들의 말의 진의를 의심해서 비난하는 것은 적어도 지금은 정당한 비난이 아니다. 이 나라 이타주의자들은 제 밥그릇이나 챙기는 현대자동차지부와는 달리 국민을 섬긴다니 거참 가상하다고 말해 줘야 한다.

3. 이타주의자들은 고상한 가치에서 살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고 있을지 몰라도 세상은 언제나 그래왔다. 세상은 언제나 이타주의의 언어가 지배해 왔다. 세상의 지배자는 그것을 통해 군림해 왔다. 지배와 피지배로 나뉘고 피지배자의 노동으로 유지되는 세상에선 그래왔다. 전제적인 지배자일수록 강력한 이타주의 언어를 갖고 있었다. 신·왕·국가·백성·국민·민족·인민…. 지배자와 시대에 따라 그들의 언어는 달랐지만 이타주의의 언어는 그 표현만 달랐을 뿐 그 의미는 다르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세상의 지배자는 이타주의의 언어가 아니면 지배하고 군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피지배자 인민이 이기주의자가 되면 지배자는 더 이상 지배자일 수 없다. 세상의 권력자는 복종자를 더 이상 복종시킬 수 없다. 피지배자의 욕망이 깨어나면 지배자는 세상을 지배할 수 없다. 그래서 지배자는 언제나 이타주의의 언어를 찾고 그것을 통해 지배한다. 언어는 노동하는 인민의 삶과 투쟁 속에서 발생한다. 이렇게 발생한 언어가 인민들 사이에 세를 얻게 돼 지배자의 기존의 언어와 투쟁을 하다가 지배자의 언어가 되기도 한다. 이때 노동하는 인민의 삶과 투쟁이 거세된 추상 언어만 살아남는다. 이렇게 끊임없이 인민의 언어는 지배자의 언어로 돼 인민을 지배한다. 그래서 노동하는 인민은 지배자의 언어를 통해서는 자신의 세상을 꿈꿀 수 없었다. 기존의 언어를 배신하고서 자신의 세상을 꿈꿀 수 있었다. 지배자의 언어를 전복하고서 자신의 욕망의 언어로 자신의 세상을 세울 수 있었다. 노예와 농노의 세상에서 노동하는 인민은 자신의 욕망을 깨워 그렇게 새세상을 꿈꿨다. 노동하는 인민의 이기주의가 지배자의 이타주의를 부수고 새세상을 세울 수 있었다. 노동하는 인민이 세상을 꿈꿀 때는 언어는 인민의 욕망으로 들끓었다. 기존의 언어로는 그것을 채울 수 없게 된다. 봉건제에서 자본제로 이행하던 시민혁명의 언어를 살펴보라. 기존의 언어는 폐기되고 인민의 욕망이 새로운 언어로 탄생했다. 권리·기본권·자유·평등·인민·국민·국가 등 시민계급의 욕망을 담은 언어들이 새롭게 태어났다. 인민의 욕망을 담아내지 못하는 세상은 병이 든 세상이다. 그 세상은 인민을 배신하는 언어들로 채워진다. 그 세상은 인민의 욕망을 억누르는 언어가 지배한다. 노동하는 인민의 욕망을 이기주의라고 비난하는 지배자의 이타주의의 언어가 득세하게 된다.

4. 노동을 빼앗는 세상에서 지배자는 빼앗기는 노동을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위해 노동하는 자에게 이타주의의 언어를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을 매일 빼앗긴다. 이 세상에서 기계가 세상의 가치를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노동자의 노동으로 세상은 세워지고 유지된다. 이 세상의 지배자는 노동자의 노동을 자신의 것으로 귀속시킴으로써 지배할 수 있다. 이 세상의 법은 노동의 생산물은 당연히 자본에 귀속하는 것으로 근로계약으로 전제하고 다만 임금을 지급하도록 정하고 있다. 생산하지 않는 자가 생산하는 자를 복종시켜 이 세상의 생산을 독점하고 지배한다. 그것을 위해선 노동자를 복종시키는 언어가 필요하다. 노동자의 욕망의 언어가 아니라 노동자의 욕망을 억압하는 이타주의의 언어가 필요하다. 바로 그 언어를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노동자는 습득해 왔다. 그래서 노동자는 누구보다도 이타주의자가 됐다. 그들을 붙들고 말해 보라. 국가·국민·경제·민족·회사 등이 그들의 입에서 튀어나온다. 그러나 노동이 빼앗기는 세상에서는 노동자는 이기주의의 언어를 말하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없다. 혹 이 말을 그냥 이기주의가 아니라 고상한 이기주의를 말한다고 이해하지 말라. 고상한 이기주의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현대자동차지부의 요구안은 그냥 이기주의고 최저임금법 개정운동은 고상한 노동자의 이기주의가 아니다. 노동자는 노동이 빼앗기는 그곳에서 자신의 욕망을 드러낸다. 드러내야 하고 드러낼 수밖에 없다. 노동자의 욕망을 아무리 고상한 언어로 무엇을 위해서라고 억누른다고 해도 그 언어는 거짓이다. 빼앗기는 자에겐 빼앗기지 말라고, 다는 빼앗기지 말라고 말해야 한다. 바보같이 빼앗기고 살지 말라고, 계산을 똑바로 하고 살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어떠한 언어를 통해 빼앗지 말라고 하는 것이라면 그 언어는 노동자에겐 거짓이다. 아무리 청년실업·사회현실·공공이익 어쩌구 고상하게 말한다고 해도 그 말은 노동자를 속이는 것이다. 현대자동차노동자가 아닌 자는 현대자동차를 자신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노동자는 다르다. 비정규 노동자도 당연히 포함해서. 노동자는 자신의 욕망을 통해서만 이 세상에서 노동자로서 투쟁할 수 있다. 노동자의 욕망이 표출되는 그곳이 투쟁이 시작되는 곳이다.

5. 몇 백 년의 투쟁을 통해 이제 겨우 이타주의의 왕 ‘신’에 맞서 이기주의의 인간을 내세울 수 있게 됐다. 욕망을 잠재우려는 지배자에 맞서 인간의 욕망을 깨워서 인간의 역사를 세워 왔다. 그런데 인간의 욕망은 시민혁명 이후 그만 자본의 욕망에 갇혀 버렸다. 시민혁명 뒤 세상의 법질서는 자본의 욕망으로 채워지고 말았다. 노동자의 노동의 생산물은 자본의 소유로, 권리로 귀속됐다. 따라서 노동자는 자신의 권리를 위해서는 자본에 맞서 내놓으라고 주장하고 투쟁해야 한다. 노동자의 이기주의만이 노동자에게 빼앗기는 노동을 권리로 찾게 할 수 있다. 귀족·자본가, 기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사회적 약자·노동자를 위한다는 이타주의의 품성으로 노동운동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는 철저한 이기주의자가 돼야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할 수 있다. 귀족·자본가의 노동운동가는 그래서 노동자를 위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노동자는 누구를 위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노동자가 아닌 노동운동가의 입에서는 사회적 약자·양심·공익 어쩌구 하는 말이 튀어나올 수 있지만 노동자인 노동운동자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 혹 노동자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면 노동자 아닌 노동운동가의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것이 틀림없다. 언어교정이 필요하다. 노동자는 그저 자신의 욕망을 위해 투쟁할 뿐이다. 그래서 노동자를 억누르는 언어들을 들춰내서 노동자의 욕망을 깨워 내야 한다. 어느 사업장에서 사회 평균수준 이상의 욕망을 이미 권리로 확보했다고 해서 그 이상의 권리를 요구하고 주장하는 것은 이기주의라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어차피 기계가 아닌 노동이 이 세상을 세우고 유지하는 것이라면 세상을 다 달라고 해도 그것은 노동자의 권리일 뿐이다. 노동자의 욕망이 문제가 아니다. 욕망을 억제당한 채 노동자가 투쟁을 포기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이기주의가 아니라 이타주의의 언어로 노동자를 속이는 것이다. 노동자의 것이 노동자의 권리로 확보되지 않은 세상에서는 아무리 고상한 말과 언어라도 노동자의 욕망을 비난하는 한 결국 노동자를 비난하고 노동자의 투쟁을 비난하는 것일 뿐이다. 노동자의 욕망을 비난한다면 결국 노동운동은 국민을 섬기는 것, 아니 자본에 복종하는 것으로 귀결되고 만다. 노동이 빼앗기는 세상에서는 노동자 이기주의만이 노동자의 권리를 세우고, 새로운 세상의 질서를 세울 수 있다. 노동자의 욕망을 깨워라. 노동자를 권리 확보에 미쳐 있는 이기주의자로 만들어라. 그것만이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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