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그제 4·19 기념식이 열린 묘소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 4·19 세력과 화해를 시도하다 격한 몸싸움 끝에 쫓겨났다. 어떤 신문은 이승만 세력이 광화문에 동상을 세우려고 한 사전 정지작업이라고 했다. 반세기가 흘렀어도 이승만 세력과 4·19 세력의 화해는 불발이다.

몸싸움 와중에 고 장준하 선생을 가까이 모셨던 전대열씨가 4·19 세력을 대표해 방송뉴스에 나왔다. 51년이 지난 지금도 전씨는 물기 묻은 목소리로 이승만에 대한 분노를 거두지 못했다. 4·19 혁명 이후 장준하 선생과 거리에서 젊음을 다 보낸 전씨가 87년 이후 보여 준 정치적 행보와 상지대 사학분쟁을 다룬 자신의 책에서 쏟아 낸 목소리만 놓고 보면 두 세력은 이미 화해하고도 남음이 있건만.

4·19는 이렇게 누구에겐 여전히 제삿날이지만 또 다른 누구에겐 생일이다. 19일을 전후해 여러 신문이 하늘을 나는 기린과 튤립이 만발한 파스텔톤의 동화 같은 광고를 하루에도 몇 면씩 실었다. 76년 4월17일 처음 문을 연 ‘삼성에버랜드’ 개장 35주년 기념광고다. 35년 전 용인에버랜드는 ‘용인자연농원’으로 문을 열었다.
 
동아일보 지면에도 35주년 개장 기념광고는 만발했다. 동아일보 사주 일가와 삼성이 사돈을 맺기 전 동아일보는 늘 삼성재벌을 혹독하게 비난했다. 76년 5월10일자 동아일보 <입장료 비싼 용인 패밀리랜드, 빈약한 시설에 과대 선전만>이란 제목의 기사를 사회면 톱으로 보도한 뒤 나흘 연속 사회면의 많은 지면을 지금의 용인에버랜드 비판기사로 채웠다. 10일자 기사는 취재기자 3명과 사진기자 1명을 동원해 “5분 정도 사자 우리 한 바퀴 돌고 5백원”, “부유층만을 위한 ‘사치공원’”, “휴게시설 없어 도시락도 땡볕서” 등 자극적인 문장으로 삼성을 흠집 냈다.

동아일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며칠 뒤 5월17일부터는 사회면 기사와 함께 <용인자연농원의 내막>이라는 기획기사를 연재했다. 6월28일부터는 삼성그룹의 땅투기를 공격하는 <땅의 애사>라는 기획기사도 연재했다. 동아일보는 개장 한 달도 안 된 용인에버랜드를 초토화시키려 작정하고 달려들었다. 개장 전 맹수를 수입해 올 때도 시비였다. 80년 3월엔 용인자연농원의 돼지 분뇨 방류사건을 누구보다 크게 보도했다.

삼성은 동아일보의 비판에도 혈족으로 엮인 TBC 방송과 중앙일보를 통해 꾸준히 선전했다. 70년대 후반 TBC 금요드라마 ‘서울야곡’과 주말드라마 ‘그건 그려’ 등에선 용인자연농원이 숱하게 무대로 등장했다.

출판인 고 한창기 선생이 70년대 말에 직접 둘러보고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에 쓴 “자연농원”이란 글은 용인에버랜드와 삼성의 맨 얼굴을 만나게 해 준다. 화려한 고풍스런 신라호텔의 겉모습과 ‘한복’ 개그 속살처럼.

“70년대 들어 재벌들이 농장이나 목장을 돈벌이 사업으로 이용했다. 삼성의 이병철 회장이 경기도 땅 450만평에 세운 용인자연농원은 농장과 목장·공원·유원지를 겸했다. 그 재벌이 운영하던 신문과 텔레비전엔 자연농원 광고가 한때 유행했다. 그 재벌의 텔레비전에서 방영하는 드라마에까지 자연농원이 무대로 등장했다. 주말마다 국민들은 사자들 틈으로 자동차 드라이브를 하자고 보채는 아들딸의 손을 잡고 꾸역꾸역 몰려들어 농원의 재무제표에 동그라미를 많이 기록했다. 사자들을 외국에서 비행기로 수입할 적에 그 재벌 신문사의 경쟁 신문사는 속도 모르고 비꼬기만 했다. 농원의 자매업체인 신문은 기사에서 용인자연농원을 ‘국토 넓히기의 본보기’라고 추겨세웠다. 그 땅에서 대대로 지켜 온 집과 논과 밭을 농원에 팔고 떠나야 했던 농부들은 새 삶을 꾸리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농원의 한복판쯤엔 널따랗고 아름다운 인공호수가 있다. 호수 둑에 올라 오른쪽을 보면 담으로 둘러친 수천 평의 뜰 안에 장엄하게 서 있는 한옥 한 채가 보인다. 그 안엔 훤칠하게 생긴 공작새가 노닌다. 한옥을 내려 건너다보는 양지바른 산등성이엔 옛날 임금의 무덤만큼이나 크고 잘 단장된 묘소가 있다. 이 무덤이 바로 농원 주인의 선친 무덤이란다.

개장 때부터 땅 넓이만 450만평으로 종합대학 대여섯 개 규모였다. 부동산 투기의 떡고물을 이렇게까지 철저하게 활용한 자본이 또 있을까. 돈 있는 중·고등학생이 일본·중국으로 수학여행 갈 때, 가난한 노동자·서민의 아이들 국내 수학여행에 용인에버랜드가 꼭 들어간다. 선산 이용한 돈벌이 놀이터를 역사유적지 수준으로 격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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