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 노무사님, 접니다.”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심상찮다.
“그래서 뭐부터 하라는 거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노조 K에서 전임자로 활동하는 간부다. 무슨 영문일까. 노조 K는 내가 소속된 법률사무소에 법률 질의를 했는데, 그 간부는 답변을 받아 보니 일할거리가 더 많아졌다고 하소연하는 것이다. 필자가 답변서를 작성하지는 않았지만 사정을 잘 아는 관계인지라 통화가 이어졌다.

노조 K는 회사에서 국내공장의 생산보다 해외공장의 생산을 늘리는 추세이다 보니 단체협약에 조합원들의 고용에 영향을 미치는 사항에 대해 노조가 개입할 여지를 뒀다. 의사결정 단계에서 노조가 참여하고, 합의하는 조항을 둔 것이다. 그리고 신규인원을 비정규직으로 충원하지 못하도록 정규직 채용을 강제하는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한데 회사는 그룹 계열사를 활용하는 방식을 써서 단체협약 합의대상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신규채용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다는 게 그 간부의 얘기다. 이런 행동이 단체협약 위반에 해당하는지, 위반한다면 법률적인 대응방안이 무엇인지에 대해 질의한 것이다. 답변서에는 경우의 수에 따라 이런저런 결과가 나온다고 분석됐다. 당연하게도 사실관계에 따라 결과는 달라진다.

방향을 바꿔 회사 주장이 타당하다고 할지라도 다른 조항을 위반할 소지가 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 신규채용시 정규직으로 채용할 것을 강제했지만 신규채용을 안 하면 그만이다. 이 또한 당연하다. 답변자는 노조가 소요인원을 채용해야 할 조건 등에 관해 단체협약에 규정해 둘 필요가 있다고 첨언했다. 회사가 단체협약을 위반하면 고소하고, 단체협약 이행을 구하는 가처분과 본안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는 설명도 들어갔다. 단체협약의 이행을 강제할 장치를 뒀다면 사측의 위반에 대한 법적 대응을 손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도 당부했다.

답변자가 단체협약을 보고 또 본 듯하다. 그 심상찮은 간부는 자신의 단체협약을 정면으로 응시하게 된 것이다. 필자가 알기에 그 간부의 질의는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해야 할 일과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사이의 거리를 파악하게 되자 대뜸 “그래서 뭐부터 하라는 거요”라고 하소연했던 것이다. 답변자 입장에서도 분석에 더해 첨언을 일일이 달아 준 것은 현재 상태로는 확실한 묘책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업무가 이런 식이다. 이러저러한 상황인데 회사에서 단체협약 등을 위반한 것인지,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에 관한 질의를 검토하고 묘안(법률적 차원에서)을 구상하는 것이다.

최근 들어 부쩍 자주 느끼는 것이지만 수많은 노조의 단체협약은 가히 언어의 곡예다. 시작은 있으나 끝이 없고, 요구는 있으나 대안이 모호한 곡예다.
그동안 우리는 힘을 어디에 써 온 것일까. 단체협약은 조합원과 노조의 권리장전이다. 실무를 하면 할수록 결국 필자는 단체협약을 보게 된다. 그런 단체협약이 참으로 모호한 단어들만 모아 뒀다면 참으로 난감하다. 아니 애통하다.

단체협약의 위력은 사용자들이 더욱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최근 단체협약 해지 통보를 받는 노조들이 발생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결국 해답은 단체협약을 어떻게 체결하느냐에 있다. 단체협약이 미약하면 그 대안은 단체협약을 제대로 체결하는 것이다. 단체협약이 해지되면 그 대안은 단체협약을 다시 체결하는 것이다. 이 단계에 오면 모든 이들이 말한다. 조직력과 투쟁력이 대안이라고 한다. 옳다. 그 조직력과 투쟁력의 과실을 꼭 보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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