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복지부가 대형병원 환자 쏠림을 막기 위해 시도했던 '대형병원 약제비 인상안'이 보류됐다.

복지부는 지난 18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이하 건정심)를 열고 이 같은 안건을 논의한 결과,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건정심은 의약계(의료공급자) 대표·소비자단체 대표·정부기관 관계자 등이 참여해 건강보험 관련한 현안을 심의·의결하는 기구다.

복지부는 "모든 외래환자에 대해 본인부담률을 인상하는 것은 대형병원에 가벼운 질환을 가진 환자가 쏠리지 않도록 하기 위한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의견이 많았다"며 "의료기관 기능재정립 방향에도 부합하지 않아 향후 제도개선소위에서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앞서 복지부는 17일 감기 등 경증환자가 대형병원을 찾게 되면 현행 30%인 환자의 약값 본인부담금 비율을 종합병원은 50%, 상급종합병원은 60%까지 올리는 '의료기관 기능 재정립 기본계획' 방안을 발표했다. 단순 외래환자는 동네의원으로 중증환자는 대학병원으로 가게 해 의료기관의 역할을 분담하겠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방안 제시는 처음이 아니다. 복지부는 지난해 12월 대통령 업무보고에서 “대형병원에 경증 외래환자가 쏠리는 현상을 개선하기 위해 외래진료비와 약값의 본인부담률을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올해 1월 건정심 제도개선소위에서 약값 본인부담률 인상안이 논의됐고, 같은달 20일에 건정심을 열고 의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여론의 반발이 거세져 건정심이 계속 연기된 끝에 지난 18일 열린 것이었다.

상급종합병원 외래비용↑·의원은 외래 비용↓

복지부가 이 같은 방안을 제시한 데에는 대형병원 쏠림 현상을 막기 위해서다. 지난 15일 건강보험심사평가원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상급종합병원의 전체 요양급여비용 중 외래 비용 비중이 2005년 34.2%에서 2009년 36.8%로 증가했다. 반면 병원급 의료기관이나 의원에서는 전체 요양급여비용 중 외래비용 비중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표 참조> 또 감기 등 의원급 외래에서 진료가 가능한 병을 지닌 환자들의 상당수도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1단계 진료 후 2단계 진료라는 의료전달체계가 붕괴된 것이다 이는 의료비 증가와 건강보험 재정 악화, 동네의원을 비롯한 중소병원의 경영악화 등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

 



"우리(보건복지부)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환자 부담을 늘리는 것뿐이다."
복지부 관계자가 17일 의료기관 기능 재정립 기본계획을 발표하며 한 말이다. 그는 대형병원 쏠림 현상에 대해 "환자가 의원이 어디 있는지 잘 모르고, (사소한 증상을) 중병이 아닐까 의심하기 때문"이라며 "대형병원과 지방 중소병원 오진율을 비교해보면 차이가 없는데 환자들이 필요 이상의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게 문제"라며 이같이 말했다. 환자의 도덕적 해이를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얘기다.
또 복지부는 “경증환자들을 대형병원에서 밀어내는 정책과 의원으로 끌어당기는 정책을 병행하겠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정작 확정 발표한 정책은 ‘환자 본인부담금 인상’뿐이었다.

'끌어당기는' 대책은 재정이 많이 들고, 의사협회 등 각종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려 수년간 방치 돼 왔던 것이다. 불만족스러운 의료서비스 제공으로 대형병원 쏠림현상의 궁극적인 원인을 제공한 병원에 대한 조치는 없이 피해자인 환자에게만 채찍을 가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과잉 진료 유인하는 병원은 내버려두고 환자 주머니만 털어”

양대 노총과 경실련·건강세상네트워크 등 시민·사회·노동단체 10여곳은 18일 오전 서울 종로 소재 복지부 앞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부가 문제를 해결하려면 외래환자를 놓고 벌이는 병원들의 무한경쟁 구조부터 개선해야 한다”고 반발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주치의제도 도입을 통한 1차 의료기관 정립, △약제비 비중 축소 △대형병원의 무분별한 진료행위 규제방안 마련 등 근본적 처방을 선행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의사이기도 한 장호종 의료민영화저지범국본 정책위원은 “복지부에게 의지가 있다면 대형병원의 본인부담률 인상에 앞서 동네의원의 본인부담률부터 낮춰야 한다”며 “큰 병원의 환자부담률을 올리는 건 손쉽게 환자들의 주머니부터 털자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건정심에 참여하는 김경자 민주노총 사회공공성강화위원장은 “대형병원의 과당경쟁이 과잉진료 조장과 무분별한 환자유인을 야기하고 있음에도 이에 대한 제도 개선에 대해선 정작 눈치만 보고 있다”며 “대형병원이 경증 외래환자를 볼 경우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조치 등 공급자 규제 병행이 실시되지 않는다면 이번 방안에 대해 절대 동의할 수 없다“고 말했다.

병원계도 재고 촉구, “환자 본인부담 인상은 부작용 우려”

병원업계도 복지부의 방안에 이견을 보이고 있다. 대한병원협회는 17일 반박 성명을 통해 "진찰료 조정과 약제비 본인부담 인상을 통해 기능 재정립 문제를 해결하려는 정책은 부작용이 우려돼 재고돼야 한다"며 "우리나라의 의료체계를 고려할 때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지역중소병원의 기능과 역할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대책이 미흡하다"고 비판했다.

중소병원협회도 같은날 성명을 통해 "원가의 60%에도 미치지 못하는 입원료 인상 없이 외래진찰료와 본인부담률만 조정하는 것은 중소병원의 어려운 경영난을 가중시킬 따름"이라며 "의원의 열악한 입원 환자에 대한 의료서비스 문제도 논의하고, 전문병원 지정 등에 대한 재정 지원책 등 실현 계획이 포함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복지부가 과연 이 같은 반대를 무릅쓰고 약제비 본인부담률 인상을 강행할지 논의 결과에 관심이 모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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