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동자가 죽어간다. 날마다 고속으로 질주하는 성장의 시대에서 노동자는 죽어나간다. 쌍용차에서 삼성전자에서 누구는 통곡으로 누구는 절규로 죽어간다. 날마다 발전하는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는 쓰러진다. 아무개는 추방당해서 아무개는 노동을 하다가 쓰러져간다. 통곡과 절규도 없이 더 많은 노동자는 노동자로 살다가 이 세상에서 이름도 없이 쓰러져간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죽어서도 노동자다. 그래서 제사상에 아무리 ‘현고학생부군신위’라고 위패를 써 놓았다고 해도 그는 죽어서도 선비가 아니라 노동자로 산다.

2. 이 세상에서 어느 이름이 노동자이고자 하겠는가. 누가 자신의 이름이 노동자이고자 하겠는가. 이 세상에서 노동자는 노예의 이름이다. 명예가 없는 이름이다. 희망이 아니라 절망의 이름이 노동자다. 그래서 함부로 저주받은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오직 저주받은 자들만이, 이 세상에서 유배된 자들이 그 이름을 외칠 뿐이다. 세상을 저주하기 위해서 그 이름을 부를 뿐이다. 도대체 무엇인가. 무엇이 이 세상에서 노동자를 노동을 저주받은 이름이라고 새겨놓았는가. 무엇이 쌍용차지부 대변인 이창근이 죽은 자들의 이름을 부를 때 노동자라 말하도록 하는가.

3. 이 세상에서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아닐까. 고전의 반열에 들어선 수많은 책들에서 찾을 수 있을까. 학파를 창시한 저명반열의 학자들이 그 답을 줄까. 노동의 실천에서 수많은 이론가들이 그 답을 제시했을까. 무어라고 했기에 우리는 이 모양이란 말인가. 이 세상은 언어와 논리로 구축돼 왔다. 그렇기 때문에 태어나서 우리는 끊임없이 훈육돼 왔다. 지금까지도 쉴 틈 없이 길들여지고 있다. 가정과 학교, 방송과 신문, 교과서와 교양도서, 픽션과 논픽션을 통해서 헉헉대며 보고 들으며 습득해왔다. 처음에는 세상에 태어나서 얼떨결에 그 뒤에는 스스로 찾아서 삶의 교양과 기술로서 습득해왔다. 그래서 나는 내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것들의 총체일 뿐이다.
한번 나를 돌아보라. 내가 생각하는 것 어느 것이 이렇게 습득하지 않은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라. 내가 행동하는 것 어느 것이 이렇게 습득해서 해야 하는 것으로 정해진 것이 아닌 무엇이 있는지 찾아보라. 없다. 수많은 언어와 논리로 차곡차곡 나를 쌓아왔다. 그래서 지금 내가 저주스럽다면 나의 이름이 저주라고 불린다면 내 모든 것을 돌아봐야 한다. 이 세상에서 노동자의 이름이 저주스럽다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돌아봐야 한다. 무엇이 거짓이고 아닌지 그 근본에서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가장 밑바탕부터 거짓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면 당신은 본질로 접근한 것이다. 당신의 심장이 방망이질 쳐대고 당신의 머리가 곤두설 것이다. 언제나 사물의 본질은 그런 것이다. 사물에 관해 우리가 이름 붙였던 모든 것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것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사물의 본질을 보게 된다. 그 지점에선 세상이 사물에 부여했던 모든 것이 흔들리고 사물은 더 이상 내가 보아 왔던 사물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바로 그 지점, 즉 이 세상의 본질을 보아야 한다. 노동자가 죽어가는 세상에서 노동자가 저주받은 이름을 부르면서 통곡하지 않으려면 이 세상에서 본질로 들어가 거짓의 실체를 들추어내야 한다.

4. 이 세상을 무엇이라 했던가. 자본주의라 했던가, 자유민주주의라 했던가. 노동자의 세상은 무엇이라 했던가. 복지국가라 했던가. 사회주의라 했던가. 노동의 대가가 임금이라고 했고 노동은 자본과 공존하며 대립과 협력해야 한다고 했거나 노동이 주인되는 세상을 세워야 한다고 했다. 이 세상을 구축한 이론가들은 이 세상이 최고라고 했다. 그렇게 학교에서 배웠다. 이 세상을 반대한 이론가들은 이 세상이 저주라고 했다. 그렇게 학습하고 운동을 통해 배웠다. 누구는 시장의 효율성을 말했고 누구는 시장의 실패를 말했다. 누구는 국가관리의 필요성을 말했고 누구는 국가의 실패를 말했다. 이러한 말들은 이 세상을 연 프랑스혁명 등 시민혁명 당시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반복돼 왔다. 단지 말하는 자의 이름과 그의 언어만 달랐을 뿐이다. 주제를 바꿔가며 변형된 채 반복돼 왔다. 사실 그 말들이 이 세상을 존재하게 한 것이었으므로 당연히 반복돼야 했다. 그리고 오늘도 대한민국은 복지논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 진보며 보수며 온갖 매체들이 그려대고 지져대는 통에 눈이 아프고 귀가 멍멍하다. 사실 그 말들에 의하면 시장의 실패의 ‘종결자’는 사회주의였다. 그리고 사회주의국가의 실패의 ‘종결자’는 시장이고 자본주의가 돼버렸다. 그러니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니니 복지타령으로 밤을 샐 수밖에.

5. 이 세상에서 수많은 논리가 주장되고 그 논리에 따라 실천했다. 그 논리로 이 세상은 살아가고 있다. 로크와 루소, 아담 스미스와 리카르도,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 베른슈타인과 로자 룩셈부르크, 리프크레이트와 에베르트, 레닌과 트로츠키, 모택동과 김일성, 히틀러와 스탈린, 케인즈와 프리드만 그리고 수많은 이론가가 자신의 논리로 세상을 파악하고 세웠다. 그리고 그들이 창조한 세상의 논리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스승들의 교시를 받들어 구체적이고 작은 세상들을 스승의 언어로 정리했다. 그래서 세상은 언제나 ‘아무개가 뭐라고 말했다’로 시작됐다. 제자들은 자신의 스승의 교시에 살고 죽었다. 이 세상의 모든 책들은 스승의 교시로 쓰여졌다. 그 세상이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어떠한 세상이든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프랑스혁명 등 시민혁명으로 이 세상은 건설됐고 러시아혁명, 독일혁명, 중국혁명 등 혁명과 전쟁이 스승의 논리를 받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서 말을 배우고 그들을 배운다. 위인전으로 교과서로 그들의 말을 배우고 그들의 행동을 존경하도록 배웠다. 그렇게 지금 우리가 있다. 그렇게 지금 이 세상이 있다. 그들이 언어와 논리로 이 세상은 구축돼 있다. 그런 이 세상에서 노동자가 죽는다. 노동자가 죽지 않는 세상, 그 세상을 달라. 세상의 어떠한 언어와 논리라도 노동자가 죽지 않는 세상을 달라고 우리는 자신에게 되물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언어와 논리를 밑뿌리부터 들추어내서 그 거짓을 낱낱이 폭로해야 한다. 근본으로 들어가 근본부터 다시 들추어야 한다. 누가 말했는지, 누가 스승인지를 따질 필요가 없다. 그것을 청출어람이 아니고 패륜이라고 불러도 어쩔 수 없다. 스승에게 되묻고 결국은 스승을 무덤에 묻어야 한다. 무엇이 거짓이고 아닌지만 무덤에 묻지 말아야 한다.

6. 이 세상은 노동으로 건설되고 유지된다. 당신이 사는 오늘은 노동자의 노동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사는 집, 먹는 밥, 타고 보는 것들 등 당신이 살아가는 모든 것이 노동자의 노동으로 생산된 상품과 용역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부정해도 노동자의 노동으로 당신이 산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노동하는 자는 자신의 노동으로 이 세상을 산다. 그렇다면 노동하지 않는 자는 어떻게 사는가. 당연히 타인의 노동으로 산다. 물론 노동하는 자의 자발적인 기부로 살기도 한다. 즉 가족 등 노동하는 자와의 관계를 통해 사는 것이다. 그런데 노동하는 자의 자발적인 기부 없이도 노동하지 않는 자가 이 세상을 살고 있다. 어떤 재주를 부려 사는 것일까. 노동하는 자를 지배함으로써 사는 것이다. 어떻게 지배하는가.
옛날 어디에서는 정복전쟁을 통해서 피정복민을 노예로 지배함으로써 노동하지 않는 자가 살았다. 정복전쟁을 통하지 않아도 내부적으로 노동하는 자를 무장한 자가 지배함으로써 노동하지 않는 자가 살았다. 노예와 농노를, 그리고 아시아에서는 전제적인 지배체제로 생산자를 수탈함으로써 노동하지 않는 자가 살았다. 어떠한 경우라도 노동관계를 지배함으로써 노동하지 않는 자가 노동하는 타인의 노동으로 산다. 그것이 무력을 통한 강압이든, 계약행위에 의한 합의이든, 어떠한 것이든, 노동하지 않는 자가 노동하는 자의 노동을 지배함으로써만 노동하지 않는 자는 산다. 만약 자유의 세상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또는 노동자의 세상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노동하지 않는 자가 산다면 그곳에서 노동하는 자가 어떻게 지배받고 있는지, 어떻게 노동하는 자가 빼앗기는지 살펴봐야 한다. 그곳에는 반드시 노동하지 않는 자가 노동하는 자의 노동을 지배하는 제도가 있다. 그곳에는 지배와 피지배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곳엔 거짓의 언어와 논리로 쌓아올린 세상이 있다. 이상이 전부다. 이상이 이 세상에서 거짓이 아닌 모든 것이다.
만약 어떠한 언어와 논리로 이것을 뒤집고 노동하지 않는 자가 노동하는 자의 노동으로 산다면 그 세상의 언어와 논리는 거짓으로 구축돼 있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노동의 가치를 말하고 노동이 신성하다 치켜세우며 노동자를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그 세상은 노동의 세상이 아니다. 그것이 자본이든 무력이든, 타인의 노동을 지배하는 힘이 무엇이든 거짓으로 쌓아올린 세상일 뿐이다. 그곳은 노동자에겐 거짓의 성채일 뿐이다. 그곳에선 노동은 소외되고 노동자는 죽어갈 수밖에 없다. 그곳에선 진정한 노동자의 민주주의도 세워질 수 없다. 오직 거짓의 이론과 그 이론에 의한 환각이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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