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주주의는 늙었다. 오늘 민주주의는 더 이상 우리의 심장을 뛰게 하지 못한다. 튀니지와 이집트의 열광에도 우리의 심장은 뛰지 않는다. 80년대의 뜨거웠던 열정은 차갑게 식어 버렸다. 더 이상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 만세를 부르지 않는다. 혹 ‘누가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노래한다고 해도 흘러간 유행가로 들린다. 진아무개 교수가 말한 대로 ‘민주주의의 황혼’이 온 것인가.

2. 1980년대 우리는 민주주의에 미쳐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어두컴컴한 다락방에서 남몰래 그 이름을 쓸 수 없었다. 민주주의 앞에 우리의 청춘을 던져야 했다. 민주주의를 향한 우리의 열정으로 거리와 광장은 붉게 물들었다. 그 이름에 우리의 심장은 터져 나갔다. 음침한 골방에서 밤을 새워 토론하고 학습하고 민주주의로 도배된 붉은 유인물을 등사하고 화염병을 제조했다. 마침내 학교와 공장은 민주주의로 붉게 타올랐다. 세상은 단순했다. 민주주의자와 그 적이 있을 뿐이었다. 적을 제외한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었다. 민주주의 앞에서 굳이 계급을 가를 필요가 없었다. 당시 민주주의 구호 앞에선 계급을 가를 수 없었다. 군사정권을 물리치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는 데서 우리는 계급을 가르지 않았다. 그래서 대동단결로 정리했다. 일부에선 계급을 말했지만 당장 군사정권을 물리치는 데서는 함께해야 한다는 것에는 차이가 없었다. 함께 거리에서 돌멩이를 던졌다. 그렇게 1980년대 우리의 민주주의는 미쳐 있었다.

3. 무엇인가. 이것은. 지금 우리의 심장은 왜 1980년대 우리의 심장이 아닌가.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는 더 이상 붉어지지 않는가. 무엇이 우리의 청춘을 버렸는가. 1980년대 우리의 ‘가투’는 직선제를 가져왔다. 거리에서 돌멩이를 함께 던졌던 사람들은 투표소에서 투표함에 투표용지를 던졌다. 대통령선거의 투표용지를 받아들자 민주주의 구호가 사라졌다.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대오는 대통령 선거운동의 대오로 변했다. 활동가들은 아무개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선거운동원이 되었다. 1980년대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었다. 장군이 대통령이 되지 않고 국민들의 투표함에서 대통령을 뽑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통령선거가 경상도·충청도·전라도로 나뉘어 지역대항전으로 실시됐다.
그래도 그것이 민주주의였다. 1980년대 우리의 청춘을 바쳐 쟁취한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었다. 그리고 오늘 군사독재가 사라진 거리에는 그 잔영만이 민주주의 구호로 떠돌고 있다. 한나라당 반대가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한나라당의 집권을 막는 것이 민주주의라고 말한다. 그래서 민노당과 민주당, 그리고 진보신당과 국민참여당을 망라해 야권이 힘을 합쳐서 2012년 대선에서 승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을 위해 또다시 민주주의의 깃발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그것뿐이다. 민주당을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는 야권연합이 집권하는 것이 지금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의 모든 것이다. 투표함에 야권연대 후보를 찍은 투표용지를 투입하는 것이 지금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다. 1980년대 이후 지금까지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었다. 장군을 찍지 않고 장군이 소속된 정당을 반대하는 것이 민주주의였다. 그렇게 우리의 민주주의는 쪼그라져 있었다. 그래서 우리의 심장은 더 이상 뛰지 않는다. 우리의 청춘은 낡아 빠진 민주주의의 구호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3. 그래서 노동자의 심장은 뛰지 않는다. 이미 1980년대 민주화운동 이후 뛰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는 노동자를 뛰게 할 수 없었다. 장군과 장군이 소속돼 있었던 정당을 찍지 않는 것으로는 노동자로서 민주주의를 위해 투표하게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를 위해 김대중을 찍고, 노무현을 찍었지만 노동자에겐 다를 게 없었다. IMF 구제금융 어쩌고 하면서 사상 유례없는 구조조정으로 사업장에서 쫓겨나야 했고 대규모로 정규직에서 비정규직으로 전락해야 했다. 비정규직법을 개악하고 노사관계선진화 어쩌고 하면서 로드맵을 만들어 결국 이명박 정권이 전임자급여를 금지시키고 교섭창구 단일화를 강제하도록 하는 길을 닦아 놓았다. 오늘 노동자의 현실은 이미 그들이 만들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민주주의 구호로 노동자들에게 다시 그들을 위해 투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이 두 개의 심장(양심)을 가지고 있을 리 없지만 그들의 심장이 민주주의 앞에 뛰고 있다면 더 이상 그래서는 안된다. 그리고 노동자는 그들이 아무리 민주주의 구호를 외쳐댄다 해도 이제는 뛰어서는 안된다. 노동자의 심장은 그들의 민주주의를 위해 뛰어서는 안된다.

4. 왜 노동자에게 민주주의는 이 모양인가. 한나라당에서 민주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것일 뿐 노동자에겐 민주주의가 없다. 도대체 오늘 민주주의에서는 노동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국가권력의 담당자를 교체하는 것일 뿐이어서 노동자의 노동관계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는다. 김대중이든 노무현이든 이명박이든 그리고 전두환이든 노태우든 누가 대통령이었던지 노동관계를 변화시키지는 않았다. 지금 민노당과 진보신당, 그리고 민주당까지 확대해서 추진한다는 야권연대에서도 마찬가지다. 비정규직법 등 노동법 개정·최저임금의 상향 등만 있을 뿐 노동관계에 어떠한 변화를 가져올 내용도 없다. 얼마든지 양식있는 사용자라면 지지할 수 있는 내용일 뿐이다. 물론 자본과 노동의 노동관계를 전제로 그 관계를 변화시키려는 어떠한 내용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야권연대는 충분히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런 내용이라면 굳이 민주당이 진보정당들과 연대하지 않아도, 표가 된다면 그래서 집권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공약으로 내걸 수 있는 것들이다. 오늘 민주주의는 이런 것이다. 적어도 노동자에겐 그저 졸리는 그들만의 경기장의 규칙일 뿐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이번에는 어떤 지역 또는 정당의 대표선수에게 투표할지를 고민할 뿐이다. 그들은 그저 방청석에서 TV 개표방송을 보면서 자신들이 투표한 후보가 당선되는지 무심하게 관전할 뿐이다. 이 세상에서 이 나라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의 세계에선 노동자에겐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노동자에겐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노동자 아닌 그들만이 외칠 수 있는 구호가 아니다. 민주주의에서 노동이 없다면 그 민주주의 구호는 노동자에겐 자본의 지배를 노래하는 것일 뿐이다. 국가와 사회를 구분하고 민주주의를 국가부문에서의 행위로 제한하는 오늘의 국가법질서는 노동자에게 민주주의를 노래할 수 없게 한다. 노동자의 노동관계는 이 민주주의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떻게 자본과 노동의 노동관계를 설정할 것인가. 노동의 결과를 누구에게 귀속시킬 것인가 혹은 얼마나 귀속시킬 것인가. 노동조직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 이러한 것들이 과감하게 민주주의로 취급되고 노동자가 행위하도록 해야 한다. 사실 오늘의 법질서는 그렇게 구축됐다. 국가와 사회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것을 민주주의로서 관여해서 세웠다. 오히려 사회질서를 구축하기 위해서 부르주아는 민주주의를 내세웠다. 프랑스혁명은 그렇게 전개됐다. 그 혁명 과정을 생각해 보라. 당시 봉건귀족(영주)와 농노의 관계를 철폐하고 귀족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분배했다. 부르주아 법질서는 국가권력으로 철저하게 사회부문에 개입해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면서 세워졌다. 그리고 그 뒤 프랑스혁명사는 자본의 법질서에 맞서는, 자본과 노동의 노동관계를 변화시키려는 노동자의 투쟁으로 쓰여졌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과정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민주주의를 내걸었다.

그러나 오늘은 모두 잊었다. 더 이상 오늘은 노동자가 노동관계의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 꿈은 악몽으로 변했다. 그래서 노동자의 꿈은 산산이 깨져 버렸다. 노동자의 민주주의는 노동자들이 무장해제된 상태에서는 꿀 수 있는 꿈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비무장인 채로 무장한 자에게 주장할 수는 없다. 이 세상에선 무장한 자는 지배자다. 비무장한 자는 피지배자일 수밖에 없다. 무장은 자신의 의지대로 타인을 굴복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힘이다. 그 힘이 무엇이든 그것을 확보하고 있는 자에게 비무장인 채로 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어떠한 세계에서는 무기였고, 다른 세계에서는 재산이었다. 무기·재산·완력 등 어떠한 것이든 타인을 굴복시킬 수 있는 무장 앞에서 무장하지 않은 노동자는 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었다. 교시와 지시, 그리고 생존과 이윤의 법칙이 노동자를 지배했다. 그래서 오늘 노동자는 이 모양이다. 노동자의 세상이라고 말했던 곳에서도 노동자는 무장이 해제된 상태에서 무장한 자가 말하는 대로 민주주의라고 외치며 무장한 자를 위해 투표소에서 투표를 했다. 자본의 세상에서는 세상의 온갖 무기로 무장한 자본의 대리인들의 공세 앞에 명함 앞에 주눅이 들어 노동자가 아닌 국민으로서 투표를 했다. 그래서 노동자는 더 이상 민주주의를 꿈꾸지 않는다. 아니 더 이상 꿈꿀 수 없다. 오늘 노동자는 ‘국민’이 아닌 ‘노동자’로서 민주주의는 알지도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노동자의 꿈을 말해야 한다. 단계니 시기니 하는 것도 노동자가 자신의 꿈을 잃지 않고 있을 때 하는 말이다. 노동자의 꿈을 잃고서 말하는 민주주의는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 노동을 떠난 민주주의는 오늘 민주주의의 황혼, 즉 퇴락에서 민주주의를 구할 수 없다. 지금 필요한 것은 노동자의 붉은 심장을 민주주의로 뛰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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