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겹다. 도대체 이놈의 나라에서 노동법을 다루는 게 지긋지긋하다. 아무개는 노동자를 위해 교수로서, 누구는 변호사로서 자랑스럽게 노동법을 한다지만 나는 지겹다. 미쳐 버릴 같이 지긋지긋하다.
 
지난해에는 전임자급여 지급금지 문제로 골머리를 싸맸다. 개악된 노조법의 시행을 두고 그 시행을 저지할 기력이 없는 노동조합들에 대해 전임자에 관한 기존 조합활동상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방안을 수도 없이 교육하고 자문하고 토론했다.
 
그 과정에서 무방비하고 무책임한 노동조합의 대응을 지겹도록 지켜보면서 기존의 권리를 보장받기 위한 대응방안을 제시하고 제안했다. 지긋지긋한 악담까지 들으면서 그렇게 2010년이 갔다. 그리고 2011년이 왔다. 이번에는 복수노조 교섭창구단일화가 시행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머리가 터질 것 같다. 1월 초에 노동부 업무매뉴얼이 발표됐다.
 
또다시 단체교섭권을 제한하는, 노동기본권 행사를 제한하는 노조법 시행을 지켜보게 됐다. 나는 왜 이 반동의 시대에 노동법을 하는가. 나는 왜 또다시 노동기본권 행사를 제한하는 노동법을 제한하기 위해 교육하고 자문하고 토론해야 하는가. 그러나 이미 시작했다. 지난주에 복수노조 노동부업무매뉴얼과 대응에 관해 법률강좌를 개최해 교육했다.
 
노동법을 하는 나는 또다시 지겹도록 노동법을 비판해야 한다. 누구는 중립적으로 학자적 양심에서 법을 해석한다지만 나는 노동법은 노동자를 위한 법이고, 노조법은 노동기본권 보장을 위한 법이라며 그 중립을 부정하면서 개정 노조법에 의해 노동기본권행사의 제한을 저지하기 위해 법을 해석해 왔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 교수들과 변호사들은 학자적 양심이요 중립적 해석이요 뭐요 하면서 몰계급의 순수를 말하지만 나는 편파적인 해석만 지겹도록 해 댄다.

2. 역겹다. 언제까지 그들을 지켜보기가 역겹다.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위한 것처럼 포장하는 권력자의 말을 듣는 것은, 노동자의 단결권 행사를 보장하기 위해 복수노조를 허용하는 개정이라고 개정 노조법을 해설하는 노동부의 업무매뉴얼을 읽는 것은 정말 역겹다. 개정 노조법은 복수노조를 허용하는 법이 아니다. 이미 개정 전 노조법은 2009년 12월31일까지만 기업단위 복수노조의 설립을 유예했을 뿐이다.
 
2010년 1월1일부터 개정 전 노조법은 그 설립을 허용하고 있었다. 2010년 1월1일 개정이 없었다면 기업단위조차도 복수노조의 설립이 전면적으로 허용될 수 있었다. 따라서 2010년 1월1일 개정 노조법은 기업단위 복수노조의 설립을 2011년 6월30일까지 다시 유예한 입법이라고 평가돼야 한다.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에 관해서는 차라리 솔직하게 사용자를 위해 단체교섭권 등 노동기본권 행사를 제한한 것이라고 밝혔다면 그 진정성은 인정받았을 것이다.
 
이제 또 얼마나 노동현장에서는 복수노조에 관한 노동부 업무매뉴얼을 통해 자본과 권력은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구속할 것인가. 전임자급여 금지와 근로시간면제제도로 지난 1년 동안 역겹도록 그들의 전횡을 지켜봤다. 권력은 개정 노조법의 시행을 내세워 기존의 편의제공까지도 금지하고자 체결된 단체협약을 일일이 문제 삼고 시정명령을 내렸다. 어떻게 노동조합의 활동을 보장할 것인가, 노동조합 활동이 제대로 수행되도록 사용자로부터 기존의 권리가 침해되지 않도록 할 것인가 하는 것은 그들의 관심이 아니었다.
 
부당노동행위를 앞세워 사용자를 위해 노동조합 활동을 제한하는 것이 그들의 개정 노조법이었다. 부당한 노동조합 활동에 관한 사용자의 간섭을 금지하고자 하는 부당노동행위제도를 노동조합 활동을 제한하고 금지하는 것을 파악해 그들의 권력을 행사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노동조합 활동에 관한 사용자의 부당한 개입을 방지하고 자주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역겹다.
 
또다시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에 관한 개정 노조법의 시행에 대해 그들의 말을 듣는 것이, 그들의 시행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 그렇다. 그리고 또다시 말할 것이다. 중립의 영토에서 학자적 양심으로 아무개 교수는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불편부당하게 몰계급적으로 고귀한 논리로 말할 것이다. 그래서 그의 언어는 역겨움을 모른다. 개정 노조법을 시행하려는 권력과 자본에게도 그는 교수님이고, 개정 노조법의 시행에 맞서야 하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에게도 그는 교수님이다. 중립의 판단자로서 고귀한 판정문을 논문으로 작성해 발표하고 강의하는 그는 누구나 떠받드는 교수님이다.
 
노동조합도 그를 찾고 권력과 자본도 그를 찾는다. 어제는 경총이 주최하는 토론회에서 발표를 하고 오늘은 ○○노총이 주최하는 토론회에서 토론한다. 때로는 그의 노동법 해석은 노동의 편으로, 때로는 그의 주장은 자본의 편으로 기울지만 그는 중립이므로 학자적 양심에서 하는 것이므로 누구도 그를 비난할 수 없다.
 
그렇게 그는 교수님으로 살아간다. 그가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에 관한 개정논의에 참여했다는 것도 그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립으로 학자적 양심으로 참여하므로 그는 당당하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노동자는 다르게 봐야 한다. 이 세상이 당연한 것이라면 노동자는 내일도 오늘처럼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의 질서가, 법·제도가 당연한 것이라면 노동자는 내일도 사용자에게 복종해야 한다. 이런 세상에서 중립을 말한다는 것은 노동에 대한 자본의 지배를 당연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는 아무개 교수가 자신의 편에서 해석하고 주장하는지를 주시해야 한다.
 
그래서 중립으로 학자적 양심이라며 말하는 그들의 해석과 주장에서 역겨움을 찾아야 한다. 만약 노동자가 전문가는 중립이므로 그의 해석과 주장이 비록 노동자에게 불리한 것이라도 전문가로서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말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인다면 그는, 즉 노동자는 이 세상을 객관적이고 공정하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오늘 세상에선 권력과 자본은 전문가의 기술을 통해 지배한다. 따라서 전문가의 말은 지배의 도구다. 노동자가 전문가의 말을 인정하는 것은 이 자본의 노동지배세상을 인정하는 것일 수 있다. 아무리 중립적이고 고상하게 포장한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전임자급여 금지와 복수노조 교섭창구 단일화에 관한 입법논의에 중립의 교수들이 참여한 바 있다. 비록 모두 그들의 주장대로 입법된 것은 아니라고 해서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되지 않는다.
 
그렇게 노동자는 오늘 개정 노조법의 시행을 맞이하고 있다. 교섭창구 단일화가 강제돼 자신들의 노동조합이 단체교섭을 할 수 없는 지경을 맞이하고 있다. 만약 노동자가 중립의 말에서 역겨움을 찾지 못한다면 노동자의 오늘은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3. 눈물겹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오늘은 눈물겹다. 그것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 눈물겹다. 1953년 3월 노동조합법과 노동쟁의조정법이 제정된 이후 계속해서 노동기본권 행사는 제한되고 금지됐다. 전쟁 중이어서 노동기본권 행사가 제한받은 채 제정됐다.
 
이렇게 제정된 법은 5·16 군사정권에 의해서 제한돼야 했다. 유신을 한다며 제한했고, 5월17일 이후 전두환 정권도 더욱 더 제한했다. 심지어는 87년 민주화운동 이후 수립된 정권들에서도 노조법은 제한됐다. 계속해서 제한되고 금지됐다. 노동기본권 보장은 헌법에나 있는 것이었고 노조법은 이를 제한하고 금지하기 위해 존재했다.
 
그렇게 노동자는 학대받았다. 그렇게 권력에 의해서 철저히 노동자의 기본권은 학대받아 왔다. 그래서 눈물겹다. 파업을 범죄로 처벌하고 금지해 왔다. 그래서 파업을 할 때마다 권력의 눈치를 봐야 하는 노동자가 눈물겹다. 그 파업은 정당하고 그래서 처벌을 면할 수 있다는 노동행정관리의 말을 듣고서야 안심하는 그들을 지켜봐야 하는 것이 그렇다.
 
이 나라에서 노동법을 하는 자로서 노동기본권 행사를 두고 좌절하고 가위눌림 당하는 노동자들을 지켜보는 내가 그렇다. 이제 또다시 교섭창구 단일화 시행을 지켜봐야 한다.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 행사가 농락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한다. 어떻게 지켜볼 것인가. 그저 중립으로 관전하며 그 시행결과를 평가할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4. 힘겹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투쟁은 언제나 힘겹다. 노동기본권이 제한되고 금지됐기 때문에 노동자의 투쟁은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사용자들은 제멋대로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고 노동자를 해고해 왔다. 단체협약 등 각종 노사 간의 합의는 쉽게 무너지고 노동조합이 반대해도 대규모 정리해고가 단행된다.
 
투쟁이 힘겨우니 노동조합은 사용자에 맞서기가 더욱 힘들다. 이러한 조건에서 교섭창구 단일화가 2011년 7월1일부터 시행된다. 노동자의 투쟁이 힘겹고 노동조합이 노조법 개악에 맞설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 교섭창구 단일화가 강제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방법은 이 나라 노동자를 좌절과 가위눌림으로부터 떨쳐 나게 하는 수밖에 없다.
 
그것이 지금 노동조합 등 노동자조직이 할 일이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노동자를 억누르는 역겨움을 똑바로 직시하도록 하는 것에서 시작돼야 한다. 그래야 힘겨워도 이 나라 노동자는 눈물겹게 역겨움에 맞서 지긋지긋한 권력과 자본에 맞서 자신의 권리를, 교섭창구 단일화 강제에 맞서 노동기본권 행사를 보장받을 수 있는 데로 나아갈 수 있다. 억압된 좌절은 내면에 분노를 안고 있다. 억압된 분노는 언제든지 행동으로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을 지금 튀니지는 보여 주고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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