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온통 사랑타령이다. TV 드라마를 보고 영화를 봐도, 소설을 읽어도 사랑이다. 며칠 전에 페이스북에 가입했더니 그곳에서도 친구라면서 서로 ‘좋아요’고 칭찬의 댓글 달기에 바쁘다. 사이버 세상도 사랑으로 넘쳐난다. 이렇게 이 세상에서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 가끔은 사람이 일을 해서 살아간다는 것도 잊을 지경이다. 보이는 세상은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고 들떠 있다.
사랑이면 계급도 정치도 넘어선다. 노동자와 사용자 사이의 경계도 사랑으로 무너진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경계도 사랑으로 무너진다. 우리의 세상에선 사용자와 지배자의 사랑이 계급과 정치를 무너뜨린다. 이렇게 계급과 권력의 투쟁의 장이 갑자기 화해의 강으로 돌변한다. 그러면 모두가 떠벌리기에 바쁘다. 사랑이 진리인 듯이 떠들어 댄다. 평화와 화합을 가져온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노동자가 사용자의 사랑을 받들면 그 지점에선 노동운동은 사라진다. 피지배자가 지배자의 사랑을 칭송하면 그 지점에선 정치투쟁은 사라진다. 그래서 사랑이 문제다.

2. 돌이켜 보면 이 세상에선 언제나 사랑타령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랑한다고 했다. 마구 나를 사랑한다고 했고, 무조건 나는 당신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단어로 표현하는 말들도 한 사람으로서 해야 한다는 그 말들은 언제나 사랑이었다. 틈만 나면 수시로 주지시켰던 충효라는 것…. 효라는 것도 부모를 사랑하는 것이었다. 충이라는 것도 결국 나라를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태어나서 배운 것은, 사람관계, 사회와 국가의 질서에 대하여 우리가 배운 것은 모두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래 사랑뿐이었다. 우리라고 정해진 경계 안에서는 우리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랑해야 한다고 배웠다. 그래서 당연하게 알았다. 그리고 그렇게 우리는 사랑했다. 부모 등 가족, 고향과 학교·직장·국가와 민족을 사랑했다.
우리는 사랑해야 했다. 한 가족이니까 우리는 사랑해야 했다. 존대·복종·공경·우애 등 가족관계에서 사랑은 그렇게 표현됐다.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배웠으므로 우리는 세상이 무너져도 우리 가족은 사랑하게 됐다. 한 나라이니까 우리는 사랑해야 했다. 충성이 나라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었다. 월드컵 축구가 아니라도 모두가 나라사랑하는 애국자들이다. 대한민국법은 그렇게 준수된다. 그리고 노동자도 사용자를 사랑해야 했다. 무수한 단어로 그 사랑이 표현됐다. 그리고 이러한 우리의 사랑은 법전에 새겨져 강제됐다. 그래서 사랑은 이 세상에선 법이다. 법이 작동하는 영역이므로 사랑도 권력관계가 됐다.

3.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이 세상에선 사람은 사랑으로 살아간다는데, 우리는 어떻게 사랑할까. 노동자는, 투쟁하는 노동자는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힘들다. 이 세상에선 사랑하지 않곤 살 수가 없으므로 투쟁하는 노동자는 힘들다. 노동운동은 노동자가 사용자와의 경계를 긋는 것에서 시작됐다. 노동자가 사용자와는 계급적 이해관계가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경계 긋고 시작됐다. 그렇게 150년 이상을 달려왔다.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노동을 자신의 것으로 지배하고 귀속시키는 사용자에 대립해 노동자의 것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해 왔다. 그동안 노동과 자본의 전선에선 수많은 격전이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전진과 후퇴가 있었다. 그 과정에서 경계가 흐려지면서 노동자와 사용자의 이해관계가 다르지 않다고 권력자들은 선동했고 그때마다 노동운동은 침체됐다. 그 권력자들은 사용자도 우리니까 사랑하라고 했다. 노동자는 사용자를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의 법질서로 노동자의 사용자에 대한 사랑을 강제했다. 파업 투쟁은 사용자에 대한 사랑의 배신이므로 법은 금지하거나 제한했다. 히틀러·무솔리니뿐만 아니라 무수한 권력자들이 사랑을 선동했고 국가권력으로 노동자의 사용자에 대한 사랑을 강제했다. 그리고 노동운동은 당연하게 소멸했다. 노동전선 등 국가권력이 관리하는 노동조직이 노동자조직을 대체하기도 했다. 그 나라가 공화국이라고 해서 다를 것이 없었다. 노동자의 노동이 빼앗기고 지배받는 세상은 어디에서나 노동자에겐 극복돼야 할 세상이고 그곳에서 노동운동은 전개돼야 했다. 그곳에선 아무리 노동자에게 사랑하라고 말하더라도 노동자는 사랑할 수 없었다. 노동자의 노동이 빼앗기고 지배당하는 세상에선 노동자는 사랑할 수 없다. 노동자의 노동은 노동자의 것이고 스스로 지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을 자본으로, 국가권력으로 노동자의 노동을 빼앗고 지배한다면 노동자는 사랑해서는 안 된다. 이런 세상에선 노동은 경계를 긋는 것으로부터 노동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바로 그 경계가 노동자에겐 우리를 가르는 지점이어야 한다.

4. 그런데 이 세상에선 온통 사랑타령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선 노동자는 사랑할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 헌법과 노동법도 대한민국 국민의 사랑을 그 전문과 목적에 명시했다. 산업평화와 국민경제 발전을 목적으로 했다. 대한민국은 사랑을 법으로 강제했다. 그래서 대한민국 노동자는 함부로 파업투쟁을 할 수도 없다. 파업은 국가가 형벌로 제한하고 금지했다. 예외적으로만 허용했다. 대한민국 노동법령은 그렇다. 노동자와 사용자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사용자로부터 노동자의 자주적인 권리가 보장돼야 할 지점에서 사랑으로 경계를 흐리고 절충해 버렸다.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노조법)은 산업평화와 국민경제를 내세워 노동기본권 행사를 제한하고 금지했다. 비정규직법은 비정규 근로자를 보호해야 할 지점에서 사용자의 이익과 절충해 버렸다. 그리고 법원도 그 법령의 해석을 통해 판결로 사랑의 법리를 구축해 왔다. 언제부터였던가. 너무도 오래돼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너무도 오래 전부터 경계가 필요한 지점에서 절충을 배웠다. 노동자의 이익과 권리를 말해야 할 부분에서 노동자와 사용자의 이익을 절충해 버리는 것을 당연하게 배웠다. 그래서 대한민국에서 노동자는 절충으로부터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분명히 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노동자는 노동자와 사용자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노동자의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협력과 화해, 발전이라는 절충에 빠져 자신의 이익과 권리를 잊게 되면 노동운동은 대한민국에선 지금까지처럼 절충 속에서 계속 질척일 수밖에 없다. 그곳에선 온갖 기회주의자·출세주의자·협잡꾼이 기생한다. 노동운동의 이름으로 노동자를 배신하는 행위만 난무하게 된다. 지금 이 나라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이익과 권리를 위해 전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노동운동이 노동자와 사용자의 경계를 분명히 하고 전개될 수 있도록 사랑해야 한다.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사랑이 노동운동일 때 노동운동은 노동자의 이익과 권리를 향해 전진할 수 있다. 요즘 크리스마스에 연말이라고 메리 크리스마스, 해피 뉴이어로 축하하느라 난리다. 서로 가리지 않고 마구 축하로 사랑하느라 바쁘다. 이럴 때 노동자의 사랑이 노동의 경계 안의 지점에서 우리 안에 있다면, 노동자의 사랑은 노동운동이고 그것은 파업 등 노동기본권 행사조차도 제한하고 금지한 노조법 등 노동법에서 찾지 못한 노동자의 기본권 행사를 확보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이 세상의 사랑타령 속에서도 고민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어떻게 사랑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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